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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이 있는 영화를 보면, 늘 후회를 했다. '역시 원작에 못 미치는 군, 이렇게 좋은 작품을 이렇게나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하면서 혼자서 괜한 투정을 한다. 원작을 보고나서 영화를 보는 작품도 있긴 하다. 주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 장르로 내 상상력이 미치지 못해서다. 책보다는 영상으로 봐야 더 실감나기에, 영화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찾아서 본 적은 별로 없다. 소설과 영화 사이에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냥 영화적인 감동만 느끼고 원작은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이 궁금해졌다. 영화에서 담지 못한 더 많은 이야기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먼저 보길 잘한거 같다. 만약 책부터 읽었다면, 영화는 못 봤을거 같다. 책 속에 담긴 놀랍고도 무서운 내용들을 영상으로 접하고 싶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내용이 영화를 보듯 상상이 된다. 그런데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저 글만 읽고 싶었다. 제발 영상이 떠오르지 않기만을 바랬다. 영화보다 더 잔인하고, 더 끔찍하고,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이입은 절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멋대로 영상이 그려졌으면, 감정이입은 왜 이리도 잘 되던지, 나만 세상이 보이는, 나만 다르게 사는 그 도시가 너무 무섭고 끔찍하게 다가왔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 본연의 모습들이 보여진다. 그들은 인간이니깐, 성인이니깐, 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깐. 그런데 눈이 먼다면, 나 혼자 안 보이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눈이 먼다면, 그 속에서는 이성, 인간, 성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먹고 싸고 자고 성욕을 채우는 그런 행위만 반복할 뿐이다. 


 
모든 신체 기관은 정상, 단지 눈 하나만 멀었을 뿐인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고, 인간의 본성일 수도 있고,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행동이겠지.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안 보이는 그 속에서 단 한사람만 보인다면,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할까?

 

책에서 그녀(의사의 아내)는 군중에 따라 눈이 안보이는 거처럼 행동을 하게 된다. 혼자만 눈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생기는 여러가지 문제들로 인해 스스로 눈이 안보이는 거처럼 행동한다. 만약 나라도 그렇게 했을거 같다. 나 혼자만 볼 수 있다면, 어느 공간(수용소)에 있는 모든 이들의 수발을 다 들어줘야 하고, 뭔 일이라고 생기면 여기저기서 나를 찾을테니 말이다. 좋은 일에 내 눈이 쓰인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안보이는 거처럼 사는게 여러모로 좋을거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때 많이 힘들었다. 대화에 "  " 표시도 없고, 단락도 떨어지지 않았고, 멀리서 보면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고 할 정도로 쉴 공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다보면 누가 말했고 누가 대답했고 또다른 누가 말했는지, 다시 앞 장으로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몇 번 반복하다가 누가 말한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 눈먼 사람들인데 하면서 그냥 읽었다.

 

또다른 어려움은 그 흔한 이름이 없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청소부, 까만 안경 여자, 첫째로 눈먼 남자 등으로 표현된다.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이름조차 필요가 없게 된걸까? 막상 이름을 써봤자 봐줄 사람도 없으니깐 말이다. 읽는내내 몸이 아플 정도로 무섭고 끔찍했지만, 수용소를 벗어나는 부분부터 굳었던 어깨가 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을 넘길때,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책을 덮었다. 죽을만큼 힘들어도 희망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눈이 멀게 된 거죠. 모르겠어.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응, 알고 싶어.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본문에서)』

 

최근에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는 그저 무섭고 끔찍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도 눈먼 도시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단지 볼 수는 있지만, 보고 싶은 것들만 보면서 사는건 아닐까하고 말이다. 볼 수 있지만, 제대로 못 보고 있다는 생각. 내가 보고 싶은 것들만 본다는 생각. 요즘 세상이 눈먼 자들의 도시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난, 정말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나도 슬그머니 남들처럼 그렇게 조용히 가만히 있는 건 아닐까? 눈먼 자들의 도시가 왠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눈먼 자들의 도시

저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2-1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도시에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안 보이는 `실명` 전염병이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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