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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동 올림픽공원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 단순히 백제의 역사 및 유물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백제는 물론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까지 역사수업을 다시 받는 듯한 착각에 빠질만큼 엄청난 규모의 박물관이었다. 서울에서 벌어졌던 우리 조상들의 리얼 스토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 한성백제박물관이다(소니 nex-3n으로 촬영)

 

 

입장료(관람안내정보)는 없고, 플래시 없이 카메라 촬영은 가능하다. 솔직히 촬영이 안된다고 했으면, 필기를 엄청나게 했을거 같다. 안내해주는 분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될거라 했는데, 그 두배인 3시간동안 이 곳에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나머지 수업을 한 듯 원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역사공부를 제대로 하고 왔다. 사진을 엄청 많이 찍었는데, 다 올릴 수는 없고 나름 정리해서 올려보려고 한다. 더 많은 이야기는 박물관에서 직접 가서 보는게 훨씬 좋을거 같다. 왜냐면 나만 공부할 수 없으니깐.^^;

 

 

로비 중앙에 보이는 저 녀석은 누굴까? 화석층일까 했는데, 풍납토성 성벽단면이란다. 한 화면에 담을 수 없을정도로 엄청난 규모다. 백제시대에 이런 토성을 만들었다니, 만리장성이 그리 부럽지 않는 순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을 기준으로 아랫변 43m, 윗변 13m, 높이 11m로 추정 복원하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기계가 있으니 이런 토성쯤 문제 없겠지만, 옛날에는 다 사람 힘으로 했을거 같다. 와~ 대단해, 대단해,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풍납토성 모형 옆 기획전시실에서는 '풍납토성 건국의 기틀을 다지다'를 전시하고 있다. 역사의 물줄기 한강 / 마을의 경계와 신성, 환호 / 백제국의 국읍과 읍락 /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 / 왕성의 내부 / 거대도시, 왕도 한성, 이렇게 6가지 테마로 되어있다.

 

풍납토성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2011년 동쪽 성벽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벽축조는 3차례 공정을 거쳤다. 맨 먼저 거대한 중심토루를 쌓고 나중에 안쪽으로 2차례 덧쌓는 방식으로 성벽을 완성하였는데, 3세히 후반에 첫 공사를 시작해 4세기 중반 이전에 1차 완공하였고, 이후 4세기 말과 5세기 중반에 2차례에 걸쳐 덧쌓았다고 한다. 고대의 노동방식으로는 풍납토성의 성벽 너비 43m, 최대 높이 13.3m, 둘레 3.5km의 거대한 토성을 쌓는 데에만 연인원 138만명이 이상이 필요하다.

이처럼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려면 각종 자원을 집중하고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장악, 관리할 수 있는 행정조직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늦어도 4세기 무렵에 백제가 강력한 지배체제와 고도의 토목기술을 갖춘 강성한 고대국가였음을 증명하는 인류 문화유산이다. (출처 - 한성백제박물관)

 

 

 

내부는 유물들과 각 테마별로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하나하나 읽다보면 배웠던 기억과 함께 전혀 몰랐던 역사적 사실까지 알 수 있었다. 그저 지하철 역이름 또는 올림픽공원으로만 알고 있던 풍납토성이 이런 곳이였구나, 아하~ 그렇구나.

 

 

빗살무늬 토기는 신석시시대 유물이다. 다음 중 신석기시대 유물이 아닌것은? 이라고 하면서, 꼭 빗살무늬 토기와 민무늬 토기가 보기로 같이 나와었다. 보기가 4개 중에 2개는 확실히 맞고, 이눔의 토기 때문에 엄청 헷갈려했다. 만약 여기를 알았더라면 절대 틀리지 않았을텐데, 아쉽다. 그럼 민무늬토기는 어느시대 유물일까요? 정답은 바로 아래 사진을 보세요^^;

 

 

청동기시대 유물. 요녀석이 민무늬토기란다. 이렇게 보니 별다른 차이를 모르겠지만, 직접 가서 자세히 보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풍납토성 모형이다. 또다른 모형을 만날 예정이므로 여기까지만... 

 

 

 

 

 

큰 독. 대형 용기의 등장은 그 안에 담을 식량의 양이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한강유역에서는 기원후 3세기 이후 큰 독이 등장하여 부뚜막 옆에 배치되는 현상이 관찰되는데 그 내부에는 곡물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주변의 어떤 마을보다도 많은 수의 큰 독이 발견되어서 물자의 풍부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디에 쓰이는 물건일까? 바로, 그릇받침이다. 그릇받침은 원래 어떤 물건을 올려놓는 것이지만 삼국시대의 그릇받침은 대부분 제의에 쓰는 그릇을 올려놓는데 쓰였다고 한다. 제의가 끝나면 그릇받침을 깨드리는 경우가 많다. 요 녀석도 산산조각내어 5~6개의 구덩이에 나누어 묻은 것을 찾아내 일일이 복원했다고 한다.

 

 

중앙의 지배층 또는 지방의 수장급들이 사용했다는 검은 간토기. 제작 과정이 복잡해 전문적인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한다.

 

 

풍납토성에서는 중국의 서진과 동진, 왜, 고구려, 신라, 소가야 및 대가야, 충청도, 전라도 지역과의 교류를 입증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한다. 이처럼 한성(서울)은 백제의 중심이자 고대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지였다.

 

 

제 1 전시실로 가는 길에 있던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

 

 

서울의 신사(제1 전시실)는 문명 초기 서울의 선사문화상과 권력이 출현하고 여러 나라가 성장하는 가운데 백제국이 마한의 소국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소개하는 곳이다. 

 

 

문명의 기원 코너. 그 시작은 원시인.

 

 

구석기 시대 사람의 삶. 주로 수렵, 채집이다.

 

 

또 나왔다. 빗살무늬 토기. 이제는 진짜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시험을 볼 기회가 없네.

 

 

농경의 시작, 신석기 시대다. 도토리를 신석시 시대부터 먹었다니, 진짜 오래된 식재료다. 도토리를 물에 담가 떫은 맛을 없애고 갈돌과 갈판으로 빻아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백제의 여명이자 권력의 출현, 청동기 시대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별로 다른 점 찾기을 하면서 보면 참 재미날거 같다. 학교 다닐때는 그냥 글로만 보고 외우기 바빴는데, 이렇게 재미나게 해놓으니 공부하지 말라고 해도 공부가 저절로 될거 같다. 

 

 

철로 농기구 및 무기류를 만들었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권력이 생겼을거 같다.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등장한 국가는 철기의 사용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기원 전후로 부여, 고구려, 삼한 등 여러나라가 성장했으며, 특히 서울지역에서는 마한연맹체에 속한 백제국이 성장하였다.

 

 

제1 전시실과 제2 전시실 사이에는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중 고인돌 당기기는 철없는 어른도 할 수 있을 만큼 재미나다. 혼자했더니 33미터를 당겨서 5등, 한라장사란다.

 

 

왕도 한성(제2 전시실)은 서울을 터전으로 나라를 세워 5백년의 역사를 일군 백제 한성시대의 다채로운 문화를 유물, 모형, 영상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는 소서노와 아들 비류, 온조가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는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드라마 주몽 마지막회에 나왔던 그 장면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드라마이기에 픽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사적 사실이었다.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서울에서 건국되었다. 기원후 660년까지 존속하는 동안 백제의 수도는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로 바뀌었으며 31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백제 전성기의 영토는 북쪽으로 지금의 황해도에서부터 남쪽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에 이르렀다. 한성기는 백제 전체 역사의 73%를 차지한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493년간 21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는 최대 전성기를 누렸으며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마한세력을 통합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 등 주변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백제시대 한성의 모습이다. 몽촌토성(위아래 왼쪽)과 풍납토성(위아래 오른쪽) 모형이다. 앞에 있는 터치스크린을 통해, 각 토성의 위치와 궁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대게는 그 지역의 기득권 세력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다스렸다고 한다. 지방의 수장을 회유할 때에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고급물품을 내려 주었다. 물품의 종류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고리자루큰칼,도자기, 장신구, 청동초두, 거울 등 다양했다고 한다.

 

 

동명사당이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가장 먼저 시조 동명왕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명왕을 시조로 모시는 것은 부여계의 전통이다. 백제와 같은 부여계인 고구려에서는 건국시조 고주몽을 동명성왕이라 하였다고 한다. 박물관 전시물 중 QR코드로 앱과 연결하면 3D현실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안했다. 이유는 귀찮아서...^^;

 

 

백제인들의 의식주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집은 평면모양이 육각형, 말각방향, 타원형 등 다양하여 상류층은 주로 육강형 집에 살았다. 궁궐, 관청, 사원 등의 건물에는 기와를 사용했다고 한다.

 

 

백제인들은 주로 채식을 했으며, 곡물을 끓여 먹고 조미료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하루에 두끼를 먹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거랑 많이 비슷한거 같다. 그런데 밥 양이 엄청 많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 옷과 비슷해서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를 입었으며 신분에 따라 옷의 색깔을 구분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베틀이다. 왜(일본)에 직조기술을 전했다고 하니, 기술력 하나는 슈퍼갑이었을거 같다.

 

 

백제의 꾸미개는 관,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장식, 신발 등이 있는데, 주로 귀족들이 사용했겠지. 이래서 돈, 권력이 필요한가 보다.  

 

 

백제에는 바둑과 주사위 같은 놀이가 있었는데, 특히 바둑은 개로왕이 좋아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본 바둑판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가장 멋있는거 같다.

 

 

백제 한성기에는 사람이 죽으면 움무덤, 돌무지무덤, 흙무지무덤, 돌덧널무덤, 돌방무덤(왼쪽으로 순서대로) 등에 묻었다. 움무덤은 가장 일반적인 무덤이여, 돌무지무덤은 한성기 초기에 상류층이 사용하였다. 흙무지무덤은 두 사람 이상을 묻는 다장묘이며, 돌덧널무덤은 지방사람들이 많이 만들어 썼다. 돌방무덤은 가장 발달한 형태의 고대무덤으로 주로 한성기 말기에 상류층에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글로벌 백제다. 백제는 서해를 건너 중국과 교류하고 왜에 문물을 전파하였다. 4~5세기에 백제는 고구려, 가야, 신라, 탐라는 물론 중국의 남, 북조, 왜 등 바다건너의 많은 나라들과 교류하고 경쟁했다고 한다. 문화와 외교에 있어서, 백제를 따라 올 나라는 없을거 같다.

 

 

백제는 우수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철기를 만들었다. 특히 수준 높은 상감기술을 이용해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서 주었다.

칠지도

명문은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 외곽으로는 금선(金線)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표면(表面) 또는 앞면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을 이면(裏面) 혹은 뒷면이라 부른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출처 - 다음백과사전)

 

 

『백제 동아시아를 품다. 4~5세기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다. 중국 대륙의 경우, 4세기에는 남쪽의 동진과 북쪽의 5호 16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5세기에는 남북조시대로서 남쪽에 송과 제, 북쪽에 북위가 있었다. 일본 열도는 고훈시대로서 오사카 부근의 야마토 정권이 중심세력이었다. 동남아시아에는 곤륜국와 부남국이 있었다. 이 모든 나라들과 백제는 활발한 교류를 했다고 한다.

4~5세기 동사이사 여러 나라는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구려 - 전진 북위 - 신라의 북방연합과 백제 - 동진 송 제 - 가야 - 왜의 남방연합이 경쟁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의 각축(제3 전시실)은 서울과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전개된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각축전과 한강에 남겨진 고구려, 신라문화를 볼 수 있는 곳이다. 더불어 한성 함락 후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터전을 옮겨 중흥기를 맞아 문화의 꽃을 피운 백제의 다양한 문화도 볼 수 있다.

 

 

웅진(공주)은 475년부터 538년까지 63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이 기간에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등 5명의 왕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웅진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 고분군과 공산성, 대통사지 등이 있다.

 

 

사비(부여)는 538년부터 660년까지 122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등 5명의 왕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사비기에는 백제 문화의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백제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귀중한 작품이라고 한다.

 

 

4세기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 등 정복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96년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해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고,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의 요충지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만들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까지 이 지역을 76년간 지배하였다.

 

 

삼국 가운데 국가체제가 정비가 가장 늦었던 신라는 5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를,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까지 확보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통하는 바닷길을 확보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서울 근방에 신주, 북한산주 등을 설치해 통치 기반을 굳건히 다졌으며, 통일 후에는 한산주, 한주를 두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350년 이상 지배하였다.

 

 

길고 길었던 역사수업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영상 수업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것도 4D입체영상 수업이다. 15분으로 칠지도에 대한 이야기, '유린 백제로 가다'와 해상왕국 백제 이야기, '담지의 모험'을 하루에 2편씩 교차로 볼 수 있다. 미리 알았다면, 시간분배를 해서 2편 다 봤을텐데 아쉽게 담지의 모험만 봤다. 관람정원은 36명이며, 선착순이라고 하지만 어린이 우선이므로 어른은 못 볼 수 있다. 관람료는 무료. 의자도 움직이고, 바람도 나오고 4D 입체영상은 맞는데, 어린이을 위한 상영관이라서 그런지 살짝 어설프다. 

 

 

『백제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해양문화가 발전했다. 서해 바다를 통해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를 오갔다. 바다 건너편 나라들과의 교류를 백제 사회의 개방성과 다문화 성향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래서 백제의 지배층은 조상이 서로 다르고 문화전통이 다른 사람들, 모여든 사연이 서로 다르고 목적이 다른 사람들, 언제든 바다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을 백제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통합의 리더였다.』"백제는 어떻게 문화강국이 되었을까?"에 나오는 마지막 문구인데, 과거만도 못한 현재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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