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그리고 광복으로" 빛을 담은 항일 유산 (in 덕수궁 돈덕전)
광복 8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전시가 열렸고 열리고 있다. 모두 다 가보고 싶었으나, 부산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을 시작으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 덕수궁 돈덕전까지 왔다. 여기서 끝낼까 하다가,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을 아니 갈 수 없다.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도 가야 하는데, 내년쯤에나 가지 않을까 싶다. 암튼, 제국에서 민국으로 그리고 광복까지 "빛을 담은 항일 유산"을 만나러 덕수궁 돈덕전으로 향했다.


수문장 교대의식으로 출입을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매표소로 가는 길은 붐비지 않아, 티켓을 구입(1,000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돈덕전으로 향하면서 중화전과 석조전 등 전각을 찍었지만, 전시에 집중하기 위해 개인소장용으로 외장하드로 보내버렸다.
돈덕전은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청경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이해 신축한 건물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졌으며, 1층은 폐현실, 2층은 침실로 구성되어 있다. 각국 외교사설의 연회장과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활용되었다.


고종은 경운궁(지금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공포하고 자주독립국가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다. 자주국의 국권을 외교활동, 외교권을 지키려는 황실의 선언은 통한의 시대를 이겨내려는 역사적 기록이다.

"나는 승인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체결 과정에서 광무황제는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고, 수교국에도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는 등 저항을 지속했다. 결국 강제 체결 사실이 국제 언론에 보도되면서 을사늑약은 1900년대 항일 외교, 의병, 언론 저항을 촉발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준은 회의장 입장이 거부된 뒤, 각국 언론과 외교관을 찾아다니며 대한제국의 호소를 배포했으며, 7월 14일 헤이그 호텔에서 순국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상철은 회의가 무산된 뒤, 귀국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이후 연해우와 만주에서 대한13도의군, 대한광복군정부 등을 조직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평생을 바쳤다.
이위종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국제기자협회 회견에 참석해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해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이후 러시아에 남아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한인 사회의 권익 보호와 항일운동에 기여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자신의 의거가 개인적 암살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을 처단한 전쟁 행위임을 당당히 주장했다.

일통청화공은 일본인을 포용해 소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유묵이다. 뤼순형무소 간수과장이었던 기요타에게 써준 것으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 사상을 보여준다.





1919년 4월 15일, 만세운동에 일부 주민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이게 한 뒤 총살하고 불을 질렀다. 이 참극으로 28명이 희생되고, 민가 31채가 소실되었다. 3·1 운동 탄압 과정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집단학살 사건이다.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의 형상을 먹으로 덧칠해 만든 태극기로, 1919년 3·1 운동 당시 제작되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9년 진관사의 칠성각 해체 복원 과정에서 발견되어 진관사 태극기라 이름 붙여졌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해 편찬한 역사서이자 자료집이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 측의 왜곡을 바로잡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해 사료집을 편찬했다.

1917년 신규식,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한흥교, 홍명희, 박은식,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 14명이 국내외 동지의 총단결을 주창하며 서명한 선언서이다. 1910년 8월 29일을 황제권이 소멸한 구한국 최후의 날이며, 민권이 발생한 신한국 최초의 날이라고 주장하며 공화제 국가 건설을 제기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구성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의회이다. 임시의정원은 국민 주권에 입각한 민주광화국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임시정부의 모든 활동에 정당성과 민주적 기반을 제공했다.









안경집은 홍커우 공원 의거 당시 윤봉길 의사가 몸에 지니고 있었던 유품이다.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는 장제스의 극찬을 받았다. 이는 훗날 한중 연합 항일 전선과 한국광복군 창설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의원회 김구 주석이 독립의지를 담은 글귀와 서명을 씨 친분이 있던 벨기에 미우스 신부에게 준 택극기이다. 미우스 신부가 미국으로 가 도산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이 태극기를 전달했다.




193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은 각각 행정부와 입법부로서 균형을 이루며 광복 이후의 민주공화국체제를 준비했다. 임시정부가 중국 각지에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안, 임시의정은 헌법과 법률을 제정하며 독립 국가의 제도적 기틀을 다졌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드디어 독립군 통합의 결실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직접 조직한 최초의 정규 무장부대로,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이후 화북의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까지 참여하면서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전선이 형성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이 밝았다. 27년간 이국땅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그리고 한국광복군 장병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와 감격에 휩싸였다. 오랜 투쟁 끝에 찾아온 해방의 기쁨은 이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승화되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을 거다. 6·25라는 전쟁의 비극이 닥칠 거라고...

그리고 80년이 흘렸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바람 잘 날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왔고 보내고 있고 보낼 것이다. This too shall pass(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현재의 어려움도 고통도 결국 끝날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을 주는 격언이다. 3·1 운동에서 빛의 혁명까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한, 우리가 이기고 우리가 해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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