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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에 부활한 덕수궁 돈덕전

복원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이날만을 기다렸다. 석조전과 정관헌, 중명전에 이어 돈덕전은 어떤 모습일지 매우 몹시 궁금했기 때문이다. 개방 초창기는 사람이 대거 몰릴 거라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 달 정도 지났으니 이제는 됐다 싶다. 100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덕수궁 돈덕전이다.

 

돈덕전은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 청경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신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석조전은 영국 왕실 느낌이 난다면, 돈덕전은 프랑스 왕실 느낌일까나? 석조전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다.

와~ 이런 곳을 이제야 복원을 하다니, 문화재청이 너무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참 잘했어요(싱어게인3 임재범 버전)~ 

 

나무로 인해 외관이 잘 보이지 않다. 굳이 오래된 나무를 둘 필요가 있나 했는데,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돈덕전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회화나무이기 때문이다. 1670년에 식재가 됐다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회화나무는 상서로운 나무로 궁궐 주변에 많이 심었다. 선비들도 회화나무를 좋아해서 마을 주변에 많이 심었는데, 이를 학자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좀 더 가까이~

돈덕전은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아름다운 건축물로, 오얏꽃 문양(대한제국의 국장)이 인상적이고, 색감이 꽤나 화려하다. 돈덕전은 고중 승하 이후 방치되었다가 덕수궁의 권역이 점차 축소되고 공원화되기 시작하면서 1933년 이전에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왜 100년 만에 개방이라고 했는지 알겠다.

 

1층 복도

층별 안내를 보면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석조전처럼 원래 어떤 공간인지 실감 나게 재현했을 줄 알았는데, 외관과 달리 내부는 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관람을 했는데, 결과는 박물관이 확실하다. 석조전과 달리, 중명전처럼 돈덕전도 사전 예약이 없어서 내심 의심했다.

지금은 전시실이지만, 원래 돈덕전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있었다.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 숙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청와대에 영빈관이 있듯, 덕수궁에는 돈덕전이 있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 선포 이후 국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근대적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국제행사를 추진했다. 1902년,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51세가 되는 해를 맞아 다수의 외국 귀빈을 초청해서, 황제가 세계 각국 원수와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니외에 과시하고자 했다. 

지금의 상설전시실1은 폐현실로 황제가 외국사절을 맞았던 곳이다. 대한제국이 원했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를 실현하고 열강과 대등한 근대국가의 모습과 주권 수호의 의지를 세계에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콜레라의 창궐과 러일전쟁의 시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영상은 1902년과 1903년에 수립된 국제행사로서의 칭경예식 계획을 바탕으로, 만약 칭경예식이 열렸더라면이라는 가정을 담아 상상으로 재현한 것이다. 

왜 상상일까? 1902년 국제행사로 기획되었던 칭경예식은 전염병의 창궐로 연기, 1903년 다시 추진하고자 했으나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끝내 열리지 못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부산 엑스포 유치와 관련해 전시 중~
열린 바닥은 돈덕전 지하공간으로 보일러실로 추정
돈덕전 출토 타일
돈덕전 출토 몰딩편
돈덕전 출토 벽돌

복원하면서 색감을 지금의 감각으로 화려하게 했나 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니 지금보다 그때가 더 화려했을 듯싶다. 근대화도 좋지만 석조전이나 돈덕전이나 무턱대고 따라 하지 않았나 싶다. 정작 본인(고종황제)은 제대로 누리지도 못했으면서 건물에 힘을 너무 쓴 듯하다.

 

2층 복도로 테라스로 나갈 수 있어요~

상설전시실 2는 근대 외교의 중요한 사건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새롭지가 않다. 역사에 관심이 많거나 중명전을 먼저 방문했다면, 많이 본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고로, 스치듯 가볍게 지나쳤다.

 

1876 조일수호조규부터 시작된 암울한 우리 역사~
강진희 그림 '화차분별도' / 장음환 그림, 팽광예 글 '일하향임도'

두 대의 기차를 그린 화차분별도는 서양의 발달된 기술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던 조선 정부의 의지와 이를 실현시키려는 주미 조선 외교관들의 노력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일하향임도는 청나라 공사관원들이 탑승한 증기선이 드넓은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가는 모습을 그렸다. 강진희는 초대 주미공사관 수행원, 팽광예는 주미 청나라 공사관원이다.

 

1897년 10월 12일 새벽, 조선이 대한이 되던 날!

1897년 10월 14일 자 독립신문 논설. 고종은 환구단으로 행차해 고유제를 지내고 대한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환구단에서의 제사를 마치고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예복은 갖춘 조정의 관료들에게 하례를 받고, 즉위식과 관련하여 수고한 관료들에게 시상하였다. 

고종은 경운궁에서 새로운 국호를 대한으로 선포하고, 황제 즉위에 대하여 여러 나라의 공사와 영사들의 축하를 받아 자주적 독립 국가의 위엄을 드러냈다. 

 

대한제국기 외교관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1904년 러일전쟁까지 대한제국은 자주적인 근대화의 성과를 거두었다. 대한제국은 서양 열강과 대등한 입장에서 독립을 지키기 위해 외교를 중시했으며, 외교는 체계를 갖추었고, 교류의 장은 점차 넓어졌다. 하지만 역사는 고종의 바람과 다르게 흘러갔다.

 

러일전쟁과 민들레
을사늑약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격을 띤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직접 한국 황제폐하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아래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행사하며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업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는다.

광무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인)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인)

 

이 늑약은 외교권 박탈이라는 주권과 관련된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정식 조약이 아닌 협약으로 체결됐다. 조약문에 조약 명칭이 없는 등 외교 문서로서 절차와 형식상 결합이 많다. 그리고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체결되었기 때문에 이는 불법적 외교 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는 하단 링크 참조)

 

대한제국기 고종이 사용했던 어새로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원수들에게 보낸 친서와 특사들에게 발급한 위임장 등에 사용했다. 사각형의 인판에 거북 모양의 손잡이가 있고, 명주실로 된 끈을 달아서 전통적인 어보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헤이그 특사 3인

대한제국은 네덜란드로부터 1906년 2월과 4월에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장을 받았다. 이를 기회로 여긴 고종은 특사를 파견했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일행은 가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지만, 열강은 이를 외면했다.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했고, 일본은 특사 파견이 을사늑약을 위반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1907년 7월 고종을 퇴위시켰다.

 

많이 허전한 아카이브실
서울 진관사 태극기 속에 내가 있다네~

진관사 태극기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강점기의 태극기로서, 불교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층에 달리 2층 전시실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에 있는 전시와 거의 똑같다 할 수 있다. 많은 예산을 들여서 복원했을 텐데, 공간활용을 이렇게 엉성하게 해도 되나 싶다. 외관처럼 내부도 접견실과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 숙소로 꾸몄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아니다. 내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야겠다.

2018.11.16 - 덕수궁 중명전 을씨년스러운 그날 을사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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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덕수궁 내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 밖에 있다. 황실의 서재였다가, 황제의 편전이었다가, 을씨년스러운 그날 이후 사교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2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원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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