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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덕수궁 내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 밖에 있다. 황실의 서재였다가, 황제의 편전이었다가, 을씨년스러운 그날 이후 사교클럽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2년간의 복원공사를 통해 원형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치욕스런 역사의 현장을 복원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한번으로 족할, 아니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역사였기에, 두번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을사늑약의 현장 중명전 앞에 서니, 어느때보다도 가슴 깊이 와닿는다.

 

미세먼지로 하늘은 뿌옇고, 며칠 전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탓에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자고로 나들이는 즐거워야 하는데, 오늘만은 그러하지 못하다. 정동길을 시작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덕수궁까지 참 많이 다녔는데, 중명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덕수궁 내에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덕수궁을 샅샅이 살펴보지 않아서 놓쳤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매번 중명전만 놓쳤다는 것이다. 궁 밖에 있을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창덕궁에 비해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궁이 쪼개진 줄 모르고 그저 작은 규모의 궁궐인 줄 알았다. 중화전, 석조전, 선원전 그리고 중명전까지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국답게 절대 작은 궁궐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중명전은 외톨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중명전은 덕수궁이 아니라, 정동극장 옆에 있는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기를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도, 직진이 아니라 좌회전은 처음이다. 제복 경찰관이 있던데, 담너머에 있는 구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때문이 아니라 중명전을 지키기 위해서 서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관람료는 무료 / 휴관일은 월요일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 그런데 왜 중명전일까? 원래는 수옥헌으로 황제 서재 용도로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1904년 덕수궁에 큰불이 나, 고종황제는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중명전이라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다닐때 연도 암기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연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예외다. 을사늑약은 중명전이 황궁의 편전이 된 후, 1년만에 일어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늦은 저녁 중명전은 일본 군대에 둘러싸이게 된다. 12시를 넘겨 18일 새벽 2시, 고종황제의 승인도 없이 을사늑약은 체결이 된다. 

 

왜 중명전일까 대한 답은, 편전은 임금이 평소 거처하는 궁전이다. 임금이 평소 머무는 곳에서 조약을 체결 했으니, 그자리에 고종황제가 있었다는 가짜뉴스는 진짜뉴스가 되어 퍼져나갔을 것이다. 즉, 중명전이 중요했던 거 아니라, 고종황제가 어디서 머무는지가 중요했던 거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중명전의 뒷모습

중명전 뒤편에는 작은 공터가 있는데,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했던 민희당지 터다. 편전은 임금이 업무를 보는 곳이고, 침전은 주무시는 곳이다. 중명전이 외국인들을 위한 클럽으로 사용됐을때, 민화당은 수영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도그xx.

 

중명전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때 궁궐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경운궁 본궁과 중명전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처럼 사용되었다.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질 당시(1899년)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중명전은 고종화제가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1907년 강제퇴위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중명전의 내부는 대한제국 역사 특히 을사늑약에 대한 역사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1층에는 총 4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2층은 올라갈 수 없게 되어있다.

 

제1 전시실, 덕수궁과 중명전
덕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 중명전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

아날로그와 디저털의 만남이랄까? 옛 덕수궁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만 했으면 아날로그에서 끝났을텐데, 천장에서 있는 빔프로젝트에서 멋진 성우의 목소리와 함께 긴박했던 구한말 덕수궁의 역사가 펼쳐진다. 동영상으로 담아오고 싶었으나, 직접 가서 봐야하기에 꾹 참았다. 글로만 되어 있는 안내문보다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으니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거 같다. 

 

제2 전시실, 을사늑약의 현장

들어오고 싶지 않았던 공간이다. 늑약은 무력 또는 강압에 의해 억지로 맺은 조약을 의미한다. 을사조약이라고 배웠던 거 같은데, 조약은 국가간의 문서에 의한 명시적 합의이니 늑약이 맞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2시 고종황제의 승인도 없이 무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그렇다면 늑약문에 도장을 찍은 이는 누굴까?

 

일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두 제국을 결합하는 공동의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국이 실제로 부강해졌다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이 목적을 위해 아래에 열거한 조목들을 약속해 정한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금후에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 및 사무를 감독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와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관리와 백성 및 그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책임지며, 한국 정부는 이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격을 띤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아래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서울에 주재하며 직접 한국 황제폐하를 만나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 및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곳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가지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아래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행사하며 아울러 본 협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할 것이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과 약속은 본 협약의 조항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업을 유지할 것을 보증한다.

 

이상의 증거로 아래의 사람들은 각기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받아 본 협약에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는다.

 

광무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 박제순 (인)

메이지 38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인)

 

이토 히로부미 (가운데)
왼쪽부터 박제순, 한규철, 민영기, 이하영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양 옆으로 있는 인물이 을사늑약에 도장을 찍은 자들이다. 을시오적인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제외한, 한규철, 민영기, 이하영은 반대했던 인물이다. 민영기(남작 작위)와 이하영(작자 작위)은 늑약에 반대만 했을뿐 친일파였다. 유일하게 한규설만 끝까지 반대했으며, 조선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조선교육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교육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저 하룻밤 사이에 딴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끝까지 동의를 거부한 한규설은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되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그날 밤의 상황을 회고담으로 남겼다. 

 

제3 전시실,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민국

불법적으로 체결된 늑약이니,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을사늑약 무효화를 위한 활동이 전개됐다. 하지만 세계는 우리편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열강으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우위를 인정받았다.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러시아와 일본이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러일전쟁은 종전을 고했다. 이로써 일본은 국제사회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인정받게 된다.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는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압박해 양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황태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고 양위를 거부했으나, 일제는 이를 공식화하고 순종의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순종은 조선의 27대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다. 일제는 을사늑약에서 외교권을 빼았더니, 사법권에 경찰권까지 박탈하고 마침내 주권까지 빼앗아갔다. 

 

황제어새

독일, 영국,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로 황제의 친서를 보냈지만, 역사는 우리 편이 아니었다. 

 

제4 전시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고종황제는 헤이그 특사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각국에 특사를 파견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유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영국, 미국, 독일 등 열강이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우위를 인정한 상황에서 특사들의 활동이 소기의 성과를 얻기는 힘들었다.

 

헤이그특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로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상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열강의 동정과 후원을 얻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의 참가국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일제의 훼방으로 본회의 참석은 좌절됐다. 

이일로 말미암아, 고종은 순종에 대한 양위의 형실을 빌어 사실상 폐위를 당하게 되고, 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한일신협약을 강요해 우리의 내정까지 장악하게 된다. 

 

빼앗긴 들도 다시 찾았고, 봄도 다시 찾아 왔건만, 이 허탈감은 뭘까?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발에 찬 듯, 한걸음 한걸음 떼기가 너무 힘들었다. 중명전 담너머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치 다른 세상인 듯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1905년 11월 18일 을씨년스러운 그날 아침,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을사늑약은 절대로 되풀이 되서는 안되는 역사다. 그날의 일을, 그날의 아픔을, 그날의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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