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무장 독립투쟁의 정신적 지주"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 (in 서울역사박물관)
99칸의 저택에 살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나와 우리 가족은 아무 탈없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대저택이 무슨 소용일까? 그 많던 재산을 다 팔아서 독립자금으로 쓴다. 서울에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있다면, 안동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한 이상룡 선생이 있다. 임청각에서 태어난 양반 출신이지만, 집안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만주로 넘어가 독립군 양성에 온 힘을 다한 인물이다.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이다.


임청각은 경북 안동에 위치한 고성 이씨 종택으로, 조선 시대 왕이 아닌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로 지은 99칸 저택이다. 그런데 일제는 임청각의 정기를 끊기 위해 중앙선 철도를 깔았고, 그로 인해 저택 절반이 파괴되었다. 80년이 넘게 임청각은 훼손됐지만, 2025년 복원 사업이 마무리되면 다시 99칸의 웅장한 모습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상희였으나, 1911년 중국 망명 이후 상룡으로 개명했다. 그나저나 우리들의 광복절처럼 11월까지 전시를 하는 줄 알았는데, 8월 31일에 끝났다. 일찍 올려야 했는데, 뜸을 너무 오래 들였다.


단발령 때 의병활동을 지원했으며, 을사늑약 때는 독립자금을 마련해 의병을 조직했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상룡은 실패의 원인을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데에서 찾았다. 명문가 출신의 유학자로 평생을 살아왔지만, 서양의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07년 류인식, 김동삼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에 적극 참여하며 안동 지역의 신교육을 이끌었다.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와 행동강령을 통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을 알렸고, 교육과 산업을 통해 스스로 힘을 기르는 자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압록강상망만주(이상룡 지음 / 이동익 씀) "압록강 변에서 만주를 바라보며" 저곳은 부여가 나라를 세웠던 곳. 우리 땅이었다. 지금은 남이 차지하고 있지만.
이상룡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 자금을 마련했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념을 받아들인 근대사상가답게,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키며 계급 질서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실천으로 보여줬다. 1911년 음력 1월 5일, 안동을 떠나 1월 27일 압록강을 건넜다. 이후 3월 7일, 마침내 길림성 회인현 횡도천에 도착해 서간도에서의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도강(이상룡 지음 / 이동익 씀) "27일 강을 건넘" 왜놈이 집과 논밭을 빼앗더니 이제 처자식마저 넘보는구나. 차라리 머리가 떨어질지언정, 무릎을 꿇고서 종이 되지는 않으니. 집 나선 지 어느새 한 달이 넘어, 벌써 압록강을 건너버렸네. 누굴 위해 발길을 머뭇거리랴? 가슴 펴고 가리라. 나는 가리라.

초기 한민족 자치조직의 설립 과정에서 이상룡은 동료 애국지사들과 함께 힘을 모아 노력했다. 초기 독립자금 마련에는 서울 출신 이회영 6형제가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 큰 힘이 되었고, 이상룡 역시 간도로 떠나기 전 집안 재산을 처분했다. 이후 자금이 바닥나자 종택 임청각을 팔겠다는 결연한 뜻을 밝히며, 문중으로부터 1,000원의 독립자금을 지원받았다.

1919년 2월,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 39인이 만주 길림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작성자인 조소양은 이 선언서를 통해 대한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자 민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바로 독립을 이루는 것임을 일깨우며 목숨을 걸고 피 흘려 싸워 이뤄낼 것을 호소했다.
서명자에는 이상룡을 비롯해, 김규식, 김동삼, 김좌진, 조소앙, 여준, 이동녕, 이동휘, 이승만, 이시영, 박은식, 신규식, 신재초, 안정근, 안창도, 허력 등 39명이 이름을 올렸다.

1920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의 책임자 독판 이상룡이 북로군정서 책임자인 사령 김좌진에게 보낸 편지이다. 본론에서 "이장녕에 대해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하나이자 둘이고, 둘이자 하나이므로... 부득이 맡고 있던 직책을 거두고 그를 보내겠다"라고 했다. 이 편지를 쓴 당시 이상룡은 63세, 김좌진은 32세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이상룡은 서간도에 남아 체계적인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조직 구성에 힘을 쏟았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많은 우국지사들이 만주로 망명하면서 일본 육사 출신 지청천과 김경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신팔균, 운남 육군강무학교 출신의 이범석 등 지도자들이 합류했고, 입학생 수도 크게 늘어났다.
약 10년 동안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된 3,500여 명의 졸업생들은 무장독립군으로 성장해 봉오동-청산리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일부는 의열단에 들어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1940년대 초에 결성된 한국광복군의 핵심 전력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나는 이에 일반 국민의 앞에서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삼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의 직분을 맡고자 하나이다. 직무에 임하여 항상 헌법을 준수하며 민의에 근거하여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국가의 완전한 독립을 조속히 성취하여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되찾고자 하나이다.
우리 만족이 나라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힘써 싸워온 것은, 멀리 갑신개혁과 갑오개혁 이후 계속되어 온 운동이라. 그러나 혹은 외력에만 의존했고, 혹은 조직이 완전치 못하였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경술국치 이후에 대의를 좇아 일어난 의병의 기치와 지사의 열혈로 운동이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온 민족이 깨어나 소생의 신기원이 삼일운동으로 나타나 민국의 임시정부가 건설된 바, 과거 7년 동안 한 뼘의 땅도 광복하지 못하였으니, 이에 대하여 누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그러나 돌이켜 생각건대, 지난 시기는 주로 독립의 정신을 알리는 선전의 시기에 속하였기에, 전 민중이 조직적 단합을 이루지 못하여 운동의 효과가 더디었는지라.
이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의 시작점에서 국민 전체가 온전히 대동단결하여 함께 힘을 다해 싸워야 하겠으며, 이를 신속히 이루려면 먼저 진정으로 희생하며 꾸준히 투쟁해 온 용감한 전사들이 신속히 최고기관 아래 완전하게 뭉쳐 운동의 기초를 단단히 하고 역량을 강화해야 할 줄 깊이 믿고, 이에 힘쓰려 하나이다.
평소 재주가 없고 아는 것이 적은데 더욱이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어 두려운 생각이 밤낮 떠나지 아니하옵는 바, 오직 모든 일은 여러 사람의 마음과 힘을 모으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마땅히 합심동력하여 대업을 속이 성휘함을 바라나이다. "(대한민국 7년 9월 24일 국무령 이상룡 취임식 기사와 취임사)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국무령에 오른 이상룡은 임시정부 이유필을 비롯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출신 인사들을 고루 내각에 포함시켜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방향과 지역 간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내각을 제대로 구성할 만큼 충분한 협력을 끌어내지 못하자, 이상룡은 1926년 2월 국무령 자리에서 물러나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1931년 10월, 평생의 동지였던 김동삼의 체포 소식과 이장녕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결국 1932년 5월 12일, 향년 75세로 서란현 소과전자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그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유족들은 안동으로 모셔가려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그의 유해는 하얼빈 취원창에 안장됐다. 해방 이후인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1990년 9월 13일, 이상룡의 유해는 비행기를 통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왔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고향 안동의 임청각을 거쳐서 같은 해 10월 11일 국립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6년 5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의 임시정부요인 묘역으로 옮겨 다시 안장되었다.
이상룡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호적을 거부한 이유로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다. 2009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면서 이상룡을 포함한 62명의 독립운동가에게 국적이 공식적으로 회복되었고, 중국 길림성에서 서거한 지 77년 만에 그의 본래 호적지인 임청각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국무령 이상룡과 임청각이라는 타이틀 아래 나라 위한 얼과 글이라는 부제가 있다. 이상룡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정통 유학자이다. 그의 애국애족 정신과 사상은 문집 '석주유고'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와 글에도 뛰어났던 그는 임청각과 민주 망명지 주변의 풍경을 감성적으로 담아낸 시는 물론, 나라가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한 슬픔과 독립을 향한 절박한 의지를 표현한 작품도 많이 남겼다.

서사록(이상룡 지음 / 이동익 씀) "서간도로 이주하다" 지금 내가 떠나는 길은 난리를 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 몸과 가족을 보존하려 한다면 객지가 고향보다 나을 리가 없다. 고향에는 문전옥답과 고대광실, 술 익는 항아리가 있어, 먹고살며 형제간에 정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다면 왜 고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황폐하고 궁벽한 간도 땅으로 가려하는가? 아아, 나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룡의 손부 허은의 구술서인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 보면, 신흥강습소에서 개천절 등 각종 기념행사 대마다 이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을 통해 이상룡이 애국가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멜로디가 아닌 가 아닌 올드 랭 사인 버전으로 부르면, 더 울컥합니다.

임청각은 고성이씨 이증이 영산현감에서 물러난 뒤 안동에 처음 정착하면서 그 기반이 마련됐고, 그의 아들 이명이 의흥현감에서 물러난 뒤 말년을 보내기 위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에 나오는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을 길게 불고, 맑은 물가에서 시를 짓는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임청각은 영남산 동쪽 기슭, 낙동강을 마주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이상룡에게 임청각은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 꼭 돌아와야 할 삶의 뿌리였다.


1942년, 일제는 중앙선 철도를 놓는다는 명목으로 임청각의 부속 건물과 문간채 일부를 철거하고, 앞마당을 가로질러 선로를 설치했다. 이는 이상룡 가문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지는 행위였다.
많이 늦었지만, 2014년부터 임청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철도 선로를 이전하고 방음벽을 철거하는 등 주변 환경을 정비하는 공사가 추진됐다. 2025년 광복 80주년에 맞춰 완료될 예정이라고 하니, 가을 혹은 겨울쯤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임청각을 만나게 된다. 안동에 다시 갈 이유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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