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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되찾은 날" 우리들의 광복절 (in 서울역사박물관)

2024년 12월 3일로부터 2025년 4월 4일까지 4개월이 걸렸다. 지금도 여전히 불순물(?)이 남아있지만, 일단락이 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그런데 1910년 8월 29일 한알병합조약이 체결되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약 35년이 걸렸다. 4개월도 이리 힘들었는데, 35년은 상상조차 안된다. 그러기에 빛을 되찾은 그날,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 4월 4일은 그날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아니 빙산의 일각 아니 새발의 피만큼 느꼈던 날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광복절"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에 있어요~

3·1절은 100주년을 직접 맞이했지만, 광복 100주년은 이승보다는 저승에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기에, 80주년을 매우 기쁘게 맞이하고 싶었다. 특히, 계엄을 직접 겪었기에 더 그런 듯싶다. 광복(光復)은 빛을 되찾음이라는 뜻으로 광복절은 빼앗긴 땅과 주권을 도로 찾은 날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대통령 파면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이상의 이상의 기쁨이었을 거라 확신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손으로 만든 광복이라면 우리 역사는 많이 달라져있을 거다. 반민특위는 완벽하게 일을 끝냈을 테고, 친일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거다. 그 이후 벌어진 제주 4·3, 4·19, 유신, 1980년 광주, 2025 계엄 따위는 역사책에 등장하지도 않았을 거다. (역사에 만약이 없기에, 이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임을 밝힙니다.)

 

내부는 요런 느낌으로 글자가 무지 많아요~
광복 직후 독립의 순간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된 조선독립기념 태극기
해방 조선 기념 우표와 편지지
독립기념 메달

광복 직후 창립된 국제보도연맹에서 발행한 시사화보 잡지 국제보도이다. 국제보도연맹은 해방된 조국의 언론 자유를 수호하고 민주 언론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해방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낸 사진과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만화 해방일기

1946년, 정부 수립 이전에 열린 첫 번째 광복절 경축식은 민족 통일과 자주독립이라는 이상을 표방했다. 좌우 이념 대립이 고조됐으며, 미군정이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8월 15일은 미군정이 해방일로 명명하고 공휴일로 지정했고, 1947년에는 이를 해방기념일로 바꿔 행사를 진행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해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이 개최, 1949년에는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이라는 명칭으로 이어졌다. 광복절이라는 공식명칭은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사용되었다.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

"부탁하노니, 동포여 미군정에 아첨에 신경을 모리를 일삼는다든가 사리와 사욕에 눈이 현혹한다든가 하여 자립과 민족의 복리에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공약된 독립은 안전에서 만리외 창해 밖으로 다름질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국을 저버리고 조국을 이 강호외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토내에 있는 듯하니 이는 모두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장벽일 것입니다." (그 장벽을 과감히 내쳐야 했는데...)

 

김구선생혈투사
여운형투쟁사

한국전쟁 이후 광복절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중요한 계기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50년대 문학, 음악, 영화 등은 광복의 감격과 전쟁의 참상이라는 이중의 역사 인식을 담아냈다. 

 

1950년대 한국영화는 6·25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전후 복구기의 사회상 그리고 해방 이후 민족 서사를 복원하려는 흐름이 공존했다. 영화 내용은 주로 전쟁의 비극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전후 혼란과 재건 의지를 다뤘다. 

 

1950년대 문학은 광복의 감격과 6·25전쟁의 비극이라는 이중의 현실 속에서 탄생됐다. 이 시기 작가들은 해방 이후의 혼란, 분단의 상처, 이념 갈등 속 인간 존재의 부조리를 탐구했다. 

 

한국전쟁 이후 광복절은 해방의 기쁨을 강조하기보다는 정통성 수립과 반공주의 강화를 위한 행사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광복절 경축사에는 단독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반공 이념을 강화하며, 국가 생존과 지견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다수 포함됐다. 

 

야간통행금지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에는 치안유지, 항일 세력 활동 억제 등의 목적으로 시행됐다. 미군정 시기에는 서울, 인천, 대구 등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적용되다가, 6·25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광복절 당일에는 해방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일상에서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야간통행금지가 한시적으로 해제되었다. 참고로, 야간통행금지는 1982년 1월 6일 0시부로 완전히 해제됐다.

 

1960년대 들어서면 광복절 행사는 '제00주년 광복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명명되기 시작했다. 정례적인 광복절 기념식이 시행되면서 국민의례, 대통령 경축사, 광복절 노래 합창 등 경축행사 식순이 정형화되어 오늘날 광복절 경축식의 원형이 마련됐다.

 

효장운동장, 세종문화회관, 장충체육관, 국립극장, 시민회관, 동대문운동장까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광복절 경축식 장소로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은 아니다. 음... 그때 대통령이 누구인지 구글에게 물어보니, 만주군 출신 대통령이란다. 

 

다큐영화 해방 20년사 / 조정래 작가의 동명 소설과 무관한 영화 태백산맥 포스터

1970년대는 텔레비전을 통해 광복절 경축실이 생중계 됐다. 매년 특집극을 편성해 독립운동, 이산가족, 친일 청산 등 민족의 기억을 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는 6·25전쟁 당시 활약한 전투조종사 유치곤대위를 모델로 한 영화이다. 전쟁 속 희생과 우정을 그린 반공이데올로기 영화로, 한국 최초의 항공 스펙터클과 멜로드라마가 결합한 작품이라고 안내문에 나와있다.

 

민주화운동 전단

광복절은 일제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날로, 자유와 민족 해방의 상징이어야 하지만, 군사정권과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됐다. 이로 인해 광복절은 또 하나의 해방을 요구하는 날이 됐다. 1986년 광복절에는 전국 30여 개 도시에서 민주화를 위치는 집회가 열렸으며, 이후에도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산가족문제는 진정한 광복이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과제였다. 1971년 광복절을 앞두고 남북적십자회담이 제의되었고, 1983년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이산의 아픔과 국민적 공감대로 확산시켰다. 이어 1985년 9월, 남북 간 첫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되었다.

 

독립기념관 개관 기념패 / 제38주년 광복절 경축 및 독립기념관 기공식 배지

1987년 제42주년 광복절, 유관순, 조병옥, 이동녕 등 항일 독립운동가의 고향인 충남 천안에 독립기념관이 개관했다. 이 사업은 1982년 일본 교과서의 역사 왜곡 사건을 계기로 추친되었으며, 정부와 국민이 함께 독립운동의 역사를 되새기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한 것이다. 국민 성금모금운동에는 전국적인 관심이 모여 목표액 500억 원을 훌쩍 넘어 706억이 조성됐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만 바뀌면 된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풍경이니깐. (시인과 촌장의 풍경 중에서)

 

1993년 제4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통령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신한국 창조와 민족사 복원을 목표로 제2의 광복 운동을 선언했다. 이는 일제 잔재와 권위주의 유산을 청산하고 민주주의 기반을 바로 세우기 위한 국가적 선언이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일제의 유산 위에 세워진 잘못된 역사 구조를 해체하는 노력이 시작됐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기존의 반공 중심 기념 구호에서 벗어나 식민지 시기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한 광복절의 의미를 확장시킨 사건이다. 

 

건물 계단 대리석을 활용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석

역사 바로 세우기는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으로 콘트리트로 복원한 광화문을 원래 자리로 복원, 임시정부 요인 유해 봉환과 사적지 복원,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 변경, 일제의 상징공간이었던 남산 제모습 찾기 사업 그리고 독립유공자 포상의 확대 등이 있다.

이때의 대통령은 하나회를 단칼에 숙청한 그분이다. 그나저나 조선총독부 건물을 50주년이 될 때까지 철거하지 않았다니, 끔찍하기도 하고, 그 건물이 기억에 남아 있어 더 소름 돋는다. 

 

1990년대 광복절은 국가 중심의 기념일을 넘어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기억을 생산하는 시민 축제의 장으로 전환되어 갔다. 대통령 경축사에는 국민 통합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강조됐고, 경축식의 부대행사도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광장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후 광복절은 시민이 함께 참여하고 만들어가는 축제의 장으로 바뀌어 갔다.

 

못다핀 꽃 전시 리플릿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 증언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후 수요시위와 예술 활동, 증언록 출간이 이어지며 광복절은 기억과 회복, 책임을 묻는 날로 확장됐다. 2011년 12월에는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며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고통을 조명하고 완성되지 않은 광복이라는 성찰을 이끌어냈다.

 

토지육필원고, 서탁, 찻잔세트, 재떨이, 담배지갑, 미당 창간호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민중의 시선에서 근현대사를 담아낸 작품이다. 광복을 단순한 해방의 순간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저항이 층층이 쌓인 역사적 여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토지도 엄청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을 추천하고 싶다.

 

광복 80년 서울의 변천사
라면 가격이 가장 놀랍군~

올해 광복절이 더 뜻깊게 다가온 이유는 아마도 계엄과 탄핵 때문일 거다. 대통령 탄핵은 한번으로 끝날 줄 알았고, 21세기에 계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때 반민특위는 실패했지만, 지금 3대 특검은 성공한 특별검사이자 21세기 반민특위로 길이길이 기억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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