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경기도자박물관 상설전시관 "도자기로 보는 우리역사" 2부

우리나라의 도자문화는 넓게 동아시아권에 속하면서 이웃나라의 우호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중국 청자 기술을 조화시켜 천하제일의 비색청자를 완성했으며, 세계의 유행이 백자로 바뀌자 절제의 미의식을 조선백자에 담아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항상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계 굴지의 도자문화국가로 부동의 위치를 가져왔다.

 

1부에 이어 2부 시작합니다~

철화로 그려진 사대부의 회화

광주시 선동리, 송정동 일대 17세기 분원 가마터에서는 궁중의 화원이 그린 듯한 단정하고 세련된 화풍의 철화문양이 발견됐다. 

백자철화 죽문 병 편 (조선17세기)
백자철화 매화문 접시 편 (조선17세기)
백자철화 포도문 항아리 편 (조선17세기)


자유분방한 철화백자의 지방확산

조선왕실이 철화백자를 사용하면서부터 저급품이라 여겼던 철화백자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바뀌어 갔다. 17세기 후반부터는 분원 철화백자에 자극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철화백자가 유행했다. 지방의 철화백자는 간결하게 문양을 표현한 모습에서 마치 분청사기와 같은 소탈함과 해학적인 멋을 찾아볼 수 있다.

백자철화 초문 병 (조선17~18세기)
백자철화 당초문 연적 (조선 18세기)
백자철화 운룡문 항아리 (조선17세기)


조선의 르네상스, 도자문화를 꽃피우다

18세기 조선사회의 경제적 부흥과 사회적 안정은 문예부흥 시대를 이끌고 도자문화를 꽃피웠다. 분원에서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흰 빛과 준수한 형태를 갖춘 백자가 생산됐는데, 조선 백자 미학의 정수라 평가되는 달항아리가 완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백자 연적 (조선17세기)
동체가 달처럼 둥글어 달항아리라고 불리는 백자 소문 항아리 (조선18세기)
차 또는 술을 담는 용기로 추정되는 백자 소문 병 (조선18세기)


청화백자의 활발한 제작

18세기부터는 실학이 발달해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대외무역이 흥행했다.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문인문화가 정착되면서 조선백자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됐다. 특히, 최고급 백자인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어 왕실은 물론 사대부와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애용되었다.

백자청화 모란문 대발 (조선19세기)
백자청화 모란접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장생문 항아리 (조선19세기)와 백자청화 국화문 항아리 (조선19세기)

 


실용성과 장식성의 결합, 19세기 백자 실용기

19세기에는 지속적인 상공업의 발달로 백자의 사용계층이 확산되어 실용적이면서 장식적인 백자가 다수 제작됐다. 병, 접시, 대접 등 생활에 필요한 실용기의 기벽을 두텁게 해 사용상의 견고함을 높이고, 인간의 기복장생을 염원하는 길상문을 문양으로 택해 장식성을 높였다.

백자청화 '복'명 접시 (조선19세기)
백자청화 난초문 항아리 (조선19세기)
방사형의 초화문을 장식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백자청화 화문 발 (조선19세기)
백자 대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수'문 발 (조선19세기)


사대부의 멋, 문방 갖춤

조선후기 부유한 사대부와 서민들 사이에는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며 시서화를 즐기는 이국적 취미가 유행하는가 하면, 문방구와 서책, 골동품, 분재 등을 즐기고 명승지를 유람하는 양반문화가 형성되었다.

백자청화 모란문 주자 (조선19세기)와 백자청화 매죽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산수문 사각연적 (조선19세기)
백자 소문 무릎형 연적 (조선19세기)


양각 백자의 제작

그릇의 표면을 조각칼로 깎거나 틀에 눌러 문양이 돌출되게 장식하는 양각기법은 백자의 제작이 활발해지며 장식 수법이 다양해지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다.

백자양각 국화문 병 (조선19세기)


양반 문화의 상징, 백자 병

술이나 물, 차 등을 담는 조선의 백자 병은 대개 밑이 둥글고 넓으며 손에 쥐기 편하도록 목이 길고 잘 따라지도록 입술이 벌어져 있다. 특히 조선후기의 병은 선비들의 여가와 풍류를 즐기는 양반문화를 상징하는 그릇으로 실용기는 물론 장식용으로도 애용되었다.

백자청화 산수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초충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국화접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국화문 병 (조선19세기)
백자청화 운룡문 병 (조선19세기)


생활 속의 백자

조선백자는 안정감 있고 실용적이며 건실한 형태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었는데, 일상생활과 의례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일상에서 쓰던 백자의 모습을 전통가구와 함께 전시

사랑방은 바깥 사회와 연결되는 동시에 남성들의 사회생활이 이루어지는 일상공간이다. 주로 글을 읽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므로 사방탁자, 문갑, 서안, 연상 등의 문방가구가 있다.

 

찬방은 부엌 옆에 붙어 간단한 반찬을 만들거나 조리된 음식을 소반 위에 올려 안방이나 사랑방으로 내어가는 공간이다. 주로 양반가나 중·상류층 집에서 볼 수 있고 서민들의 집에서는 찬방이 따로 없이 부엌에 찬탁을 놓고 겸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대청은 안방과 사랑방에서 건넌방으로 가는 사이에 있는 큰 마루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대청의 양쪽 모퉁이에는 주로 뒤주나 농, 사방탁자를 놓고, 벽에는 여러 자개도구를 걸어 둔다. 대청은 통풍이 잘되어 습기를 막아주기에 꿀이나 약재, 씨앗 등을 도자기에 담아 농이나 뒤주 위에 올려 보관했다.

 

백자청화 국화문 반상기 (재현품)

조선의 검소한 풍토에 걸맞은 도자반상기는 왕실뿐만 아니라 만민에게 애용되었다. 발, 대접, 접시, 종지로 구성된 반상은 장을 제외한 음식을 헤아려 기로 표기했으며, 19세기말에 등장한 지금의 첩은 반찬 가짓수를 의미한다. 

 

백자 명기 (조선16세기)
백자 지석 (조선 18세기)

무덤에 껴묻거리를 묻어주는 주방풍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내세에서 쓸 도자명기와 조상의 행적을 기록한 도자지석을 함께 매장하는 방식으로 장착되었다. 16세기, 명기는 생전에 사용하던 그릇 대신 축소시켜 만든 소형 기명을 부장하는 것으로 또 한번 변화했다. 

 

백자철화문 상준 (조선전기)
백자 제기(궤) (조선15세기)

조선의 제례(제사)는 국가 기본예식인 오례 중 길례라고도 하는데, 국가 종묘·사직이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 고을에서 행하는 모든 제사의례를 포함한다. 제기는 금속기로 제작하는 것을 규범으로 하고, 낮은 위계의 제사를 지내거나 금속제기가 부족할 때엔 도자제기를 사용했다.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까지 시대별로 우리 도자기가 이렇게나 다양했다니, 그저 놀랍고 또 놀랍다. 다른 박물관에서도 도자기를 종종 접했지만, 역사를 따라서 살펴본 것은 처음이다. 도자 역사에 대해서 완전정복한 느낌이랄까? 이동거리는 사악했지만, 더 큰 보람으로 다가왔으니 잘 다녀왔다고 해야겠다.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한 도자 경기도자박물관 도자문화실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한 도자 경기도자박물관 도자문화실도자의 목표는 유리와 같은 매끄러움, 쇠와 같은 단단함 그리고 옥과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인간은 도기에서 회유도를 거쳐 청자를

onion02.tistory.com

 

경기도자박물관 상설전시실 "도자기로 보는 우리역사" 1부

경기도자박물관 상설전시실 "도자기로 보는 우리역사" 1부우리나라의 도자문화는 넓게 동아시아권에 속하면서 이웃나라의 우호적 교류를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중국 청자 기술을 조화시

onion02.tistory.com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