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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이어 두번째 궁궐, 바로 창덕궁입니다. 별궁이었던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번 포스팅은 전각 - 낙선재 - 후원으로 총 3회로 나눠서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300여장을 찍다 보니, 한번에 다 포스팅하는건 무리네요. 같은 궁궐이지만, 경복궁과 다른 면모를 갖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정궁이었던 창덕궁입니다. (사진은 소니 nex-3n으로 촬영했습니다.)

 

 

가는 방법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오거나, 지하철 1, 3, 5호선 종로3가역 6번 출구로 좀 걸으셔야 합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 내려 인사동도 보면서 천천히 걸어갔어요. 경복궁과 달리, 지하철 역에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지 않는답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재를 많이 입긴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의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창덕궁은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쳐했던 궁궐이라고 하네요.

 

창덕궁은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습니다.(이런 나쁜눔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이래서 같은 듯 다른 느낌이 들었군요) 

 

 

저처럼 통합관람권을 있다면, 바로 입장하면 되지만, 없다면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구입하면 됩니다. 어른은 3,000원이랍니다. 후원특별관람에 대한 부분은 후원 포스팅에서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창덕궁 홈페이지에서 사전에 관람코스를 미리 알아 두시면 좋겠죠. 지도상으로 후원의 규모가 대단하네요. 전각관람은 거리가 짧아 보이겠지만, 절대 그러하지 않다는 점 미리 알려드릴게요. 자 그럼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돈화문을 지나자마자, 궐내각사로 가는 길에 창덕궁이 유네스코에 등록됐다는 기념비가 자랑스럽게 보입니다. 1997년 12월 6일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됐다고 하네요. 세계유산이란 세계적으로 뛰어나고 보편적 가치가 있어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하여야 할 문화유산을 말하는데 창덕궁이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것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고 기념비에 설명되어 있네요. 그럼요. 그럼요. 우리나라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데, 유네스코가 이를 모르고 지나치면 당연히 안되겠죠.

 

 

금천교를 건너서 안으로 들어가도 되지만, 뒷편에 보이는 궐내각사부터 보기로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 궐내각사로 갔습니다.

 

 

왕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여러 관청들이 궁궐 안에 설치되었고 이를 궐내각사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왕의 칙령과 교서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중심 시설이었다고 하네요. 대부분의 건물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멸되었다가, 2005년 복원되었습니다.

 

 

그런데 궐내각사를 참 신기했어요. 관람동선을 안내해주는 안내판을 보지 못한다면, 미로 속에 빠질 수 있는 구조더라고요. 들어가는 입구도 좁고, 문도 낮아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혹시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였을까하는 궁금증이 들었어요. 궐내각사 안내판에 "여러 관청들이 밀집되면서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는 말이 왠지 씁쓸하네요.

 

 

정조의 연구소인 규장각입니다. 정조는 즉위년(1776)에 규장각을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 설치했다가 정조 5년에 인정전 서쪽의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합니다. 역대 왕의 어제, 어필을 보관하는 장소의 기능 외에도 국가적 규모로 도서를 수집하고 보존, 간행하며 정조의 정치, 학문적 연구소 기능을 했다고 하네요. 정조 6년(1781)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창덕궁 안에 있는 규장각을 내각(內閣)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구 합니다.

 

 

내의원의 별칭인 약방은 왕실의 의료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입니다. 미로 속을 다니다 보니, 예문관을 놓쳤네요. 이래서 구중궁궐이란 말이 있나 봅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의 초상화인 어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선원전입니다. 궁궐 밖으로는 종묘를 두었고, 궁 안에는 선원전을 두었다고 하네요. 원래 춘휘전이었던 건물을 조선 효종 7년 광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어 사용하다가, 숙종 21년(1695)에 선원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초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1921년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왕의 초상을 옮긴 뒤부터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새로 지은 선원전으로 옮긴 왕의 초상은 한국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됐다고 하네요. 선원전은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을 꾸미지 않은 건물로, 조선시대 왕실 제사용 건물의 유례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미로같았던 궐내각사를 나와 왕의 거처인 인정전으로 갔습니다. 금천교를 걷너 저 문을 통과하면 인정전으로 갈 수 있습니다.

 

 

역시 왕의 거처는 참 넓군요.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외부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1층 통구조로 되어 있는 인정전입니다. ‘인정(仁政)’은 ‘어진정치’라는 뜻이며, 인정전은 창덕궁의 법전(法殿)입니다. 법전은 왕의 즉위식을 비롯하여 결혼식, 세자책봉식 그리고 문무백관의 하례식 등 공식적인 국가 행사 때의 중요한 건물입니다. 인정전의 넓은 마당은 조회가 있었던 뜰이란 뜻으로 조정(朝廷)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래서 사극을 보면 조정이란 말이 나오는 군요.

 

 

인정전 내부 정면에 임금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과 곡병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는 병풍이 있는데, 잘 보이시나요. 솔직히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어서, 내부는 자세히 볼 수가 없었어요. 여기서 잠깐... 경복궁과 창덕궁의 차이점, 혹시 발견하셨나요? 인정전 내부 천장을 보면 왠지 없어야 될거 같은 무언가가 있답니다. 바로, 전구와 커텐입니다. 이는 구한말 외국과의 수교 후, 다양한 외래 문물이 들어왔으며.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에 실내바닥이 전돌에서 마루로 바뀌고, 전구가 설치되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하네요. 임진왜란 후 조선후기 정궁을 창덕궁으로 했으니, 조선전기 궁궐의 모습은 경복궁에서, 후기는 창덕궁에서 보면 되겠죠.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왕이 신하와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곳입니다. 본래 조계청으로 불렸으나 세조 때 선정전으로 바뀌었다구 합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25년(1647) 재건했습니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선정전(宣政殿)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입니다.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합니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 이상의 당상관이상이었습니다.

 

 

선정전이 다른 전각과 다른 점은 조선 궁월에서 유일하게 남은 청기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까지는 궁궐 안 주요 건물에 청기와를 많이 사용하였으나 많은 돈과 공력이 들어 점차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인정전, 선정전 등 주요 건물 외에 다른 전각에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지만 왕이 솔선수범하여 검약을 실천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하네요.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인 대조전은 창덕궁 내전에 있는 침전으로 희정당과 같이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와 중건했습니다.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왕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누어지는데,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대조전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의 마지막 거처라고 합니다. 나라를 잃은 비통함 속에서 53세를 일기로 승하한 순종은 '광복하라'라는 유언은 남겼다고 합니다.

 

 

대조전 뒤편에 4단의 계단식 정원을 만들어 후원으로 삼았고, 누마루를 뒤편으로 돌출시켜 이를 감상하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경복궁 교태전에도 이와 비슷한 후원 아미산이 있었는데, 왕비에게 개인정원은 필수였나 봅니다.

 

 

대조전 옆에 연결된 경훈각은 창경궁의 전각으로 원래는 2층 건물로 1층을 광세전, 2층을 징광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1917년 대화재 이후 단층 건물로 재건했다고 하네요. 


 

 

희정당은 내전에 속하여 침전으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왕의 집무 공간인 편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17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강녕전을 창덕궁으로 옮겨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정전은 저 곳을 통해 들어 갈 수 없고요. 대조전과 연결된 곳을 빠져 나오면 희정전의 뒷부분을 먼저 보게 됩니다. 첨에 여기는 어떤 곳이지 했다가, 다 보고 나오니 저 문을 만나게 됐어요.

 

 

희정당은 대한제국 말까지 사용되었습니다. 1920년에 중건하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는데 가운데 대청을 서양식 응접실로 사용하였고 서쪽으로는 회의실, 동쪽으로는 방과 창고를 두었으며, 바깥 둘레는 통로, 목욕탕, 칸막이방 등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서양식 응접실에는 카펫을 깔고 유리 창문과 커튼, 전등 등을 달았습니다.

 

 

왕세자가 머물며 공부를 하던 곳인 성정각입니다. 왕위를 이을 세자는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익히고 학문과 덕성을 높이기 위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교육의 일환으로 종친이나 대신의 자제 중 영리하고 품성이 바른 아이들 5~6명을 뽑아 열흘에서 보름에 한 번 정도 세자와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게 하였는데, 이 아이들을 배동(陪童)이라고 합니다. 세자는 배동을 통해 사회성을 기르며 어진 왕의 성품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해를 품은 달이라는 드라마에서 이런 내용이 살짝 나왔죠. 

 

 

같은 듯, 다른 경복궁과 창덕궁... 조선 전기와 후기 궁궐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두 곳다 가봐야 하겠죠.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하나 있는데,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더 높게 느껴졌거든요. 계단도 더 많았던거 같고, 1층 건물인데, 2층 높이로 보였거든요. 조선 후기 왕권강화를 위해서, 건축양식이 달라져서, 둘다 아니라면 그냥 저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네요.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8 예고 - 대한민국 마지막 황태자비가 머문 그 곳, 낙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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