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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 1공화국 국무총리이자 부통령, 내각책임제였던 제 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운석 장면총리.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4.19 민주화 운동 이후 내각책임제 총리로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 피웠던 인물로, 5.16 군사 구데타를 진압하지 못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현대사에 있어, 그의 존재는 대단했을 것이다. 관용과 화해의 리더십을 보였다고 하는데, 만약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면 오늘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출처 - 운석장면기념관)

『장면총리 가옥은 그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1937년 건축가 김정희가 설계하여 한·양 절충식으로 지은 이 집은 안채를 비롯해 사랑해,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과 화장실의 내실과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과 신주거 문화 운동의 영향이 드러나 있어 근대 주거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도 가치가 있다.(리플렛 인용)』

 

월요일 휴관, 입장료 무료, 하절기는 10시부터 18시까지, 동절기는 10시부터 17시까지 개방한다.

 

"총리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안채
사랑채

마중물이 있어야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던 작두펌프.

 

가을볕은 참 따갑다. 

 

안채 옆에 있던 작은 길, 여기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살고 있는 듯,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장면총리 가족 사진.

 

사진 액자 아래에는 총리가 사용했을거 같은 흔들의자가 놓여있다.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유엔 파견 대한민국 특사 자격으로 발급받은 한국 최초의 외교관 여권으로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있다고 한다. 대청마루 중앙에 전시되어 있다. 장면총리는 우리나라 1호 여권의 주인공이다.

 

안방으로 들어가 보자.

 

장면총리와 부인인 김옥윤여사의 물건이 전시되어 있다.

 

명함, 수표책 그리고 만년필.

 

주방의 모습. 

 

초창기 싱크대 모습이 아닐까?!

 

현대식 부엌인줄 알았는데, 밖에서 봤던 부뚜막이 여기도 있다.

 

건너방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장면총리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운석장면기념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화학실험서와 학습장, 신앙에 대한 자신을 생각을 정리한 노트 그리고 기도서

장면총리는 1920년 3월 기독교 청년회관(YMCA) 영어과 최우등 졸업 후 미국에 건너갔다. 1921년 9월 뉴욕 소재 맨해튼 대학에 입학해 1925년 6월 학사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영어, 불어 구사능력과 수사학과 대중연설 같은 과목을 통해 얻은 소통 능력은 그가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나 주미대사로 선발되는데, 그리고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6·25 전쟁시 유엔군 파병 등의 업적을 남기는 데 기여한 지적 자산이자 소양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더불어 평생 수도자와 같은 자세로 신앙을 실천해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적 표상이 되었다고 한다.

 

장면총리는 1931년 동성상업학교에 부임해 영어를 가르치다 1947년 교단을 떠날 때까지 17년간 후진 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33년 가톨릭 교회가 배출한 지성들과 함께 교회사뿐만 아니라 문화운동사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톨릭 청년을 창간했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교부들의 신앙, 젬마 갈가니,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등의 저서가 있다.

 

주미대사 신임장

1948년 9월 6일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받아 차석대표 장기영, 고문 조병욱 등과 함께 9월 21일 파리의 샤이오 궁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개회식에 참석했다. 이후 장면 일행은 유엔 회원국 대표를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 승인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48년 12월 12일 한국은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유엔의 승인을 획득했다.

 

재외국인등록증, 유엔총회 연설문, 바티칸 교황청 훈장, 유엔총회 참석 자격증

6·25 전쟁이 터진 지 하루 만인 25일(현지 시간)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이사회에 참석해 북한국의 철퇴와 유엔 회원국의 침략자 원조금지를 규정한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냈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고 한다. 

1952년 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하기까지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 대한 구호안 가결, 가톨릭교회를 통해 지원받은 구호금품 본국 급송 등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쟁으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사랑채로 넘어가기 전, 대청마루 왼쪽 끝에는 믿음을 실천한 장면총리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그는 천주교가 골수에 배인 신자였다고 한다. 1921년 8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했다.

이후 그의 세속적 지우는 교육자, 외교관 정치가로 바뀌어 나아갔지만, 평생토록 성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으로서 서약한 바대로의 의무를 지키는 삶을 살아 나갔다고 한다. (강력한 리더십을 못했던 이유가 혹시 종교때문인가? 이런 생각이 살짝 들었다.)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인 사랑채. 

 

본채와 달리, 사랑채는 참 소박했다.

 

『1956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고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던 1959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5.15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민주당 구파(구 한민당 계열)에서 지지하는 김도연을 누르고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민주당 구파의 반발이 있었으나 구파인 조병옥이 같은 구파라고 김도연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는 무난히 부통령 후보로 낙점될 수 있었다.

 

민주당 지방 유세 때 곽상훈은 대통령 후보로 나오려는 조병옥과 장면을 설득시켰다. 그에 의하면 '어느날 밤 마산의 어느 여관방에서 해공과 운석 사이에 내가 눕게 되었는데, "운석, 이번에는 대통령을 해공을 주자. 어떻나? 작정해라. 그래야 우리 민주당이 잘될 것 아닌가?" 라고 하였다. 곽상훈은 장면을 종용했지만 장면은 즉석에서 쾌락을 안했다. 그런데 곁에 누워 자고 있던 신익희는 자는 척하고만 있었다' 는 것이다. 장면은 다음날 대통령 후보직을 신익희에게 양보하겠다고 선언한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신익희가 선거 직전 급사한 가운데, 부통령 선거 유세활동을 하였다. 신익희의 급서로 선거전이 이승만과 신익희의 대결에서 갑자기 이기붕과 장면의 대결로 맞상대가 바뀐 만큼 그 대결에 정면 승부를 걸기로 작정하였다. 장면은 전국 유세를 다녔다.

그러나 선거 유세기간 중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파라는 내용을 인쇄한 벽보와 그의 얼굴을 일본인의 얼굴과 합성한 벽보들이 거리에 나붙기도 했다. 5월 21일 선거에서 41.7%(401만 2654표)로 39.6%(380만 5502표)를 얻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였던 자유당의 이기붕을 20만여 표의 근소한 차로 누르고 제4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출처 - 위키백과)』

 

응접실

1960년 6월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되었으며, 장면은 선거에 출마하여 제2공화국 국무총리에 인준되었다. 이후 5·16쿠데타로 실각하기까지 9개월간 4·19민주화운동이 제기한 시대적 소명인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를 꽃피웠다고 한다. 당시 그가 펼친 정책은 경재개발계획의 추진, 국민소득 증대를 통한 빈곤탈출, 유엔 외교의 강화를 포함한 국제적 고립으로부터의 탈피, 국방력 강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민주당 구파들과의 갈등이 극심했다고 한다. 뭉쳐도 안될 판에 서로 잘났다고 싸우는 바람에 결국 어렵게 만든 민주주의의 황금시대는 쿠데타로 인해 군사독재시대로 다시 암흑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장면총리는 쿠데타 정보를 일주일 전에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5.16 군사 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지낸 장도영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일은 벌어졌고, 결국 장면총리는 내각총사퇴서를 발표하게 된다.

 

사전에 알았는데, 왜 좀 더 세밀하게 조사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쿠데타 직후 국무총리로서 진압할 수 있었을텐데, 왜 숨어버렸을까? 내각책임제였으니, 대통령보다 총리 권한이 훨신 막강했음에도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많은 의문점이 들지만, 한 사람의 실수, 잘못으로 치부해서는 안될거 같다. 어느 정도 책임은 있겠으나, 아마도 지금처럼 자기만 살겠다고 서로 싸웠을거 같다. 대장을 뽑았으나, 그 대장이 믿덥지 않아 자꾸만 태클거는 이들이 많았을거 같다. 과거 정치가 왜 지금 정치와 이리도 비슷한지. 내가 아닌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정치를 했다면, 쿠데타를 할 생각조차 못했을 거 같다. 

 

1999년 8월 13일 영전에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 번 주어보자는 것이 민주당 정부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철권으로 억압하는 대신 시간으로 다스리고자 했다. 귀와 입으로 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며,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 혐오를 느낄 때 진실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장면총리는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장면총리 가옥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단 한 개의 가마솥으로 만든 밥이 지겨워, 여러 개의 가마솥으로 다양한 맛을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다양성이 독이 되어 어느날 철갑을 두른 가마솥이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철갑 가마솥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매일 밥을 만들고 있다.

한동안 몰래 숨어서 만들었는데, 지금은 대놓고 만들고 있다. 복고패션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제발 정치만은 복고로 돌아가지 않았음 좋겠다. 더불어 잘못된 과거를 감추거나 내치지 말고, 교훈으로 삼아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인데, 9개월만에 다시 돌아가다니, 참 원통하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롯데리아와 우체국이 보이는 골목으로 가면 된다. 혜화동 주민센터를 발견했다면, 앞으로 100미터만 더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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