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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대전시립박물관

대전에 자주 갔지만, 박물관은 처음이다. 구 충남도청 옛도지사실을 갔지만 거긴 근현대사를 다룬 곳이라, 그전의 역사는 아직이다. 진작에 갔어야 했는데, 늦은감이 없지 않아 있다. 대전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모여있는 곳, 대전시립박물관이다.

 

대전시립박물관은 대전시 유성구 도안대로 398에 있어요~

"골짜기 물이 온 들판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흘러가는데, 이 냇물 이름이 갑천이다. 갑천 동쪽은 회덕현이고, 서쪽은 유성과 진잠이다. 사방을 산으로 막아 들판 가운데를 둘러쌌는데, 편평한 둔덕이 길게 뻗었고, 아름다운 산기슭이 말고도 빼어났다.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도 있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가면 살만한 곳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선사와 고대문화

대전의 역사는 선사시대에서부터~
대전 둔산동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 빗살무늬토기!

슴베찌르개는 돌날 또는 격지의 양쪽을 손질해 찌를 수 있는 형태를 만들고, 그 반대쪽은 길고 뾰족하게 만들어 사냥과 같은 활동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운데 동그란 돌은 여러면석기이고, 오른쪽에 있는 돌 같은 것들은 격지라고 한다.

 

가락바퀴는 물레로 실을 지을 때 사용하는 도구로, 선사시대에 방직술이 있었음을 증명해주는 청동기시대 유물이다. 가락바퀴 가운데 구멍이 긴 둥근 막대를 끼워 축을 만들고 섬유를 축에 이어 회전시켜 실을 만들었다. 

 

어로 도구인 그물추로 청동기시대!
반달모양돌칼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농경도구!

간돌화살촉(1)은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초창기부터 등장해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된 수렵도구로 당시 생업 활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석기이다. 활·화살 등과 함께 세트를 이루지만 유기물은 잔존하기 어려워 발굴 시에는 주로 화살촉인 간돌화살촉만 발견됐다. 2번은 청동기시대 유물인 간돌검이다.

 

농경문 청동기, 보물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농경문 청동기는 한 면에 밭을 일구는 남자와 괭이를 치켜든 사람,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는 사람을 새기고 다른 한 면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 장면은 새긴 청동 의기(儀器)이다. 

 

산성의 도시라 불리는 대전은 동쪽으로는 옥천과 청원, 남동쪽으로 금산, 남서쪽으로 논산과 접해 있으며 일찍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을 이루던 지역이다. 따라서 다른 지역에 비해 산성과 보루가 많이 남아 있다.

 

금귀걸이, 삼국시대

원삼국 시대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물질문화의 변동이 많았던 시기로 삼국시대가 성립되기 이전까지를 이룬다. 대전은 원삼국시대에 마한의 한 소국으로 추정된다.

 

사람 모양 토우 조각, 백제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대전은 백제 웅진성 북방에 속해 우술군과 그 영현인 소비포현과 노사지현 그리고 진현현으로 편재되었다. 6세기 이후 대전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선을 이루어 치열한 삼국 전쟁의 현장이었다.


고려

고려시대의 대전은 양광도 공주목 소속 회덕군 유성현, 덕진현, 진장현으로 편재되어 있었고, 회덕의 계족산과 유성의 온천은 고려사에도 수록될 만큼 유명했다.

 

청동잔과 상서로운 동물을 새긴 거울

선사시대 이래로 청동거울은 권위와 벽사를 상징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서 청동 주조기술의 발전으로 일상용품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거울 중심부에는 끈을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있고, 주변으로 네 마리의 목이 긴 새가 고리를 에워싸고 있다.

 

대전에서도 고려청자가 생산되었는데, 크게 보문사 지역과 계룡산 끝자락인 성북동 지역이 대표적이다. 구완동에서는 청자가마와 상감청자가마가 모두 발견됐다.

 

부처의 나발 조각
보문사가 기록된 충청도읍지

대전은 보문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석조보살입상, 용화사 석불입상, 보문산 마애여래좌상과 약사여래좌상 그리고 보문산 터 등이 남아 있다. 


조선

조선 전기의 대전은 회덕현과 진잠현, 공주목에 소속된 유성현과 덕진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후에 유성현과 덕진현은 없어지고 회덕현, 진잠현과 공주목의 일부에 속하게 되었다. 회덕현은 동구와 대덕구, 중구의 일부이고, 진잠현은 유성구와 서구 일대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대전
향촌의 폐단 척결이 기록된 회덕향교 현판

회덕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됐으며, 현재는 대덕구 읍내동에 있다. 진잠향교는 1405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유성구 교촌동에 있다. 진잠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등을 지급받아 30여 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석전제 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문은 지은 회덕향안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시와 글이 기록된 유고

송자대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송시열의 문집이다. 그는 노론의 영수로, 17세기 조선의 학문과 정치를 주도한 기호학파의 대표 인물로, 후학들에게 주자 이후의 동방성현으로 추앙되어 송자라 불렀으며 학문의 스승으로 숭배되었다.

 

남간정사
내부 모습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던 곳으로 송자대전을 펴냈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간이란 양지바른 곳에 흐르는 개울을 의미하며, 주자의 시 운곡남간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자적색 단령과 당상관의 벼슬아치가 입는 단령

과거시험 중 생원과 진사를 뽑던 소과에 합격한 후, 방방의(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방목에 적은 뒤 호명하는 의식)를 할 때 착용하는 띠이다. 이 영대는 띠에 있는 2개의 방물은 겨드랑이에서 어깨로 돌려 띠를 고정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띠 술은 앞으로 늘어뜨리는 방식이다.

 

백자항아리 / 백자 청화 국화무늬 병 & 항아리

조선 사대부들은 정갈한 순백자의 청아한 청화백자를 즐겨 사용했다. 백자는 반상기뿐 아니라 연적이나 필가 등의 문방구로 제작되어 사대부의 생활 곳곳에서 사용되었다. 대전에서 백자를 생산했던 가마로는 정생동 백자가마터가 대표적이다.

 

대전의 대표적인 여류시인 호연재 김씨가 지은 시 모음!
호연재 김씨에게 내린 임명장

호연재 김씨는 소대헌 송요화의 처로 송준길의 증손부이며, 오숙재 송익흠의 어머니이다. 그에게 내려진 정부인은 종2품에 해당되며, 여성에게도 법령에 따라 교지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술제조법만을 기록한 한글 필사본 조리서!
은진송씨 동춘당가에서 전해져오는 한글로 된 요리 필사본!


근대

격동의 시대와 삶의 기억
난곡 송병화는 송시열의 학풍을 계승하고 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참여한 인물

옛 대덕 산내에서 태어난 단재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주필로서 언론 활동과 해와 임시정부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용암 송용재는 1921년 미국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호소문에 대전군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일, 대전의 인동장터, 유성장터, 유천면사무소, 가수원리 산 위, 유성헌병주재소, 치마(현 갈마동) 등 다양한 장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한국인이 많아지자 일제는 1919년 대전감옥소를 설립했고, 1923년 대전형무소로 이름을 바꿨다. 도산 안찬호, 몽양 여운형, 심산 김창숙 등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한국전쟁 때 대전형무소는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비극의 현장이었다.

 

도산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의 상해 홍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가출옥했다. 그는 대전형무소로 이감 됐을 때, 칠 공장에 출역했다고 전해진다. 지승그릇은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으로 만나는 대전의 근현대사!

사진을 보면서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아래에 놀이터 같은 어린이체험전시실이 있다. 놀고 싶은 맘은 굴뚝같지만,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나이라서 멍하니 보면서 내려왔다. 

대전하면,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한국전쟁 이후 밀가루를 쉽게 구할 수 있어, 칼국수와 빵과 같은 음식이 발전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전역 가락국수에 이어 성심당이 유명하구나 했는데,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었나 보다. 역사 공부는 여기까지, 21세기 대전에서 가장 핫한 그곳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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