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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수도 서울 |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 (in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에서 경성을 거쳐 드디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영등포의 동쪽으로 불리던 영동에 가서 배추밭(땅)을 사야한다. 그럼 졸부가 됐고 돈 걱정없이 살고 있을 거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타임머신이 없어서 원통하고 아쉬울 뿐이다.

 

1945~2010년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 1945년

1945년 광복으로 식민도시 경기도 경성부는 1946년 서울특별시가 됐다. 미군정을 거쳐 1948년 서울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서울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종로구, 중구, 성동구, 서대문구, 동대문고, 용산구, 영등포구, 마포구 등 8개 구가 설치됐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관련 내용 및 사진 등이 실려 있는 미군정청 영자 화보 1947년
6.25전쟁 참전기념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개전 3일 만에 서울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한강 인도교 폭파(폭파 전에 누가 먼저 도망을 갔더라?), 미군의 용산 폭격, 치열한 시가전 등으로 인해 서울은 주택총수의 18.2%가 완전 파괴되는 등 극심한 전쟁피해를 입었다. 

 

1950~1960년대 서울

전쟁은 끝났지만 사람들은 전쟁 후유증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지만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서야 우리경제는 성장의 기지개를 켰고, 서울도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1950년 100만 명 정도였던 서울의 인구는 1963년 300만 명을, 1970년 500만 명을 돌파하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로 인해 서울 시내에 총 216,460동에 달하는 무허가 주택이 생겨났다. 무허간 판자촌은 심각한 도시 문제의 온상으로, 식수난, 공용화장실 사용과 같은 불편뿐 아니라, 화재나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많은 인명피해를 낳는 대형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1960,1970년대 한강의 변화

1966년부터 시작된 한강 개발은 홍수피해를 막고 도심의 교통난을 완화하기 위한 강변도로 건설과 도심 인구의 분산을 위한 택지 조정 및 아파트 건설 중심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당시 개발은 환경보존, 수자원의 효율적 활용, 접근성과 친수성 같은 시민생활은 고려되지 못했다.

꽃섬 난지도는 쓰레기 매립지가 되었고, 한강변에서 채취된 모래와 자갈은 건축물을 짓는 골재로 활용됐다. 한강의 기적은 한강 자연환경의 희생 위에 이룩된 것이었다.

 

1971년 10월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분양 홍보 팸플릿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현장과 1969년 판자촌 철거 후 건설된 금화아파트

1966년 서울의 인구는 72만 가구 380만 명이었으나 주택은 36만 동에 불과해 전체 가구의 절반은 집이 없었다. 이로 인해 도심 구릉이나 천변에 판자촌(무허가 불량주택)이 급속히 늘어나 1966년 13만동, 1970년 20만 동을 넘어섰다.

서울시는 미관 개선을 위해 판자촌 지대에 시민아파트 2천 동을 건립하는 계획을 세웠고 1969년 한 해 동안 15,840가구라는 엄청난 양의 시민 아파트가 건설됐다. 하지만, 이듬해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 일어나면서 건설사업은 중단됐다.

 

영동 신시가지 약도가 수록되어 있는 월간 현대주택 창간호 1976년
강남과 강북 간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된 남산제3호터널 건설공사 1978년

1970년대 강북 도심부에 집중된 국가와 도시의 핵심 기능을 한강 이남의 신시가지(영등포와 영동)로 분산시키는 3핵 도시안이 제기됐다. 지하철 2호선의 노선 변경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건설을 이러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강북 발전을 억제하고 강남 개발을 촉진하는 여러 정책도 시행됐다. 시청으로부터 반경 5km 구역에는 백화점, 도매시장, 주유소 등의 설치를 금지하고, 도심학원과 학교, 터미널도 강남으로 이전하도록 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의 삼성동 이전을 시작으로 강북의 명문 학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세운상가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남북방향으로 1.1km에 걸친 세운상가 지역은 6·25전쟁 이후 피난민과 이주민들이 자리잡았던 무허가 불량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1960년대 후반 도심재개발이 시행되면서 빈민 주거지를 강제 철거한 자리에 주상복합단지 세운상가가 들어섰다. 지금과 달리, 그때의 세운상가는 각종 전자제품과 음향기기 등을 생산, 판매하는 제조업의 중심지였으며, 청계고가도로, 삼일빌딩과 함께 도시현대화와 경제발전의 상징이 됐다.

 

공업용 선풍기와 봉제공장 재봉틀 책상 그리고 전태일 14주기 추도식 안내서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정부 주도적 개발정책의 결과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결실이다. 평화시장은 의류생산과 유통업이 결합되어 오늘날 패션타운의 원조가 된 공간이자, 한국 노동운동의 효시가 된 전태일의 극적인 삶과 죽음의 현장이다. 

10만여 명의 노동자를 품은 거대한 공업단지로 성장한 구로공단은 1970~80년대 섬유 봉제 산업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공과 벌집촌으로 대표되는 낙후된 지역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한국화장품 쥬단학 포스터 1978년

최초의 단지 아파트였던 마포아파트의 성공 이후 아파트가 주택 부족의 해결책으로 급부상했다. 1970년대 초 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아파트, 여의도 시범아파트, 반포 1단지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본격적으로 고급 아파트 시대가 열렸다.

 

서초삼호아파트 9동 000호
아들방
거실
안방
부엌
부엌과 다용도실

1978년 입주가 시작된 서초삼호아파트는 전형적인 1970년대 강남의 아파트 단지였다. 당시 중산층의 주거 형태 및 생활상이 담겨 있는 서초삼호아파트는 재건축 추진으로 2014년 철거됐다.

 

88 서울올림픽 운영요원 단복 상의와 86 서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단복
88 서울올림픽 성화봉과 호돌이 기념품과 리플릿. 모자

서울올림픽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제5공화국 정권에 의해 관 주도적 국제행사로 기획되었다. (주관적인 글이 아니라, 박물관 안내문에 이렇게 나와 있음)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잠실에는 거대한 올림픽 시설들이 들어서고, 강북 도심은 고층 오피스타운으로 재개발 되었으며, 서울 곳곳에 신시가지가 조성됐다. 이떄, 도시 곳곳의 달동네와 불량주거기는 전면 철거되어 아파트 단지로 탈바꿈했다.

 

오른쪽 사진 속 작은 동전은 시내버스용 토큰

1968년 전차가 서울 시내에서 사라지면서, 버스가 서울시민의 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1974년 서울역에서 청량리역까지 9.54km의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지하철 대중교통시대가 열렸다. 서울의 인구증가와 시가지의 확대는 새로운 도로망 확충과 버스, 지하철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연결됐다.

 

서울의 급성장 과정에서 도시 곳곳에서 생겨난 달동네는 1983년 토지 소유주와 기업의 합동재개발 방식이 도입되면서 재개발 사업 열풍이 일어났다. 산자락의 불량 주거지들은 고층아파트 단지로 탈발꿈을 했지만, 강제 집단 철거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리게 됐다. 

 

아하~  피맛골!
1978년 선데이서울 피맛골 지도

종로 대로와 평행을 이루며 배후에 뻗어있었던 뒷골목 피맛골은 조선시대 이래로 서민들의 공간이었다. 중학천 복개공사 후 1970년대 청진동 피맛골 일대의 빈대떡 골목에는 맥주집, 해장국집, 여관, 다방 등이 번성했다. 직장인과 학생뿐만 아니라 정치인, 문화 예술인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편안한 쉼터가 되었다. 

 

광복 직후 문을 연 뒤 피맛골에서 가장 오랫동안 영업을 해온 청일집
피맛골이 아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청일집을 만나다~ 
그모습 그대로인데 소리, 냄새, 사람이 없구나~
가장 마지막으로 낙서를 하지 않았을까?

청진동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선술집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청일집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대표 빈대떡집으로 손기정 선생,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서울의 문인, 학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자주 찾았던 장소였다.

2008년 청진동 재개발사업이 확장되면서 서울역사박물관은 청일집의 탁자, 의자 음식그릇, 메뉴판, 주방 조리도구뿐만 아니라 손님들의 낙서가 기록되어 있는 벽체 등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현재의 청일집은 은평구 연서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0~2010년대 서울은 연도별로 간략하게 나와 있다. 이중에서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6년 외환위기가 있었다. 

 

방탄소년단을 UN연단에서 볼 수 있도록 만든 그분, 당신이 그립습니다~
도시모형영상관에서 만나 현재의 서울

저 친구들이 어떻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알까 하다가, 아~ 맞다. 오징어게임. 드라마에서는 움직이면 죽었지만, 현실은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만 들려온다. 

서울의 역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현재진행형이다. 2010년대 이후 서울의 주요사건은 아직 없는데, 2008년부터 2017년은 가볍게 건너뛰었으면 좋겠다. 2017년부터 2022년은 공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런데 2022년은 5월부터는 할 말은 겁나 많으나 키보드를  치고 있는 내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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