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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에 있는 정동길은 덕수궁 돌담길부터 경향아트힐(경향신문사)까지의 약 500m의 거리를 말한다. 폭이 좁고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나홀로 나들이 하기에는 지루하지 않은 그런 곳이다. 지금은 사라진 정동 MBC 사옥부터 경향신문사, 정동극장, 구 러시아공사관, 구 신아일보사 별관, 이화여자고등학교 등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천천히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길 끝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그 끝에는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이 있기에 짧은 거리를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부터 시작해도 좋고, 경향아트힐에서 부터 시작해도 좋은 많은 볼거리를 갖고 있는 정동길이다. (사진은 소니 nex-3n으로 촬영했습니다.)

 

 

 

나의 코스는 정동사거리 즉 경향아트힐에서 부터 덕수궁까지로, 봄비와 함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들으면서 출발했다. 중간에 살짝 좌회전을 해서 구 러시아 공사관까지 서울 촌년의 나홀로 서울 나들이를 시작했다. 

 

 

 

지금은 경향아트힐이지만 예전 정동 MBC 사옥이 있던 곳이다. 이 곳이 기억나는 이유는 중학교 시절 난생 처음 라디오 공개방송을 갔던 적이 있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으로 별밤지기 이문세와 객원 MC 이경규가 함께 했던 그 날의 방송을 잊을 수가 없다. (관련 글 - 라디오 키드의 추억). 뮤지컬과 공연을 주로 하는 경향아트힐로 바뀐 후 가본 적은 없지만, 20대 시절 이 곳은 영화관이었다. 시네마 정동극장으로 2010년 10월에 문을 내렸지만, 20대 시절 대부분의 영화를 이 곳에서 봤을만큼 추억이 정말 많이 담긴 곳이다.

 

 

 

식당들이 즐비해 있어 평범한 골목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내려가 보면 달라진다.

 

 

 


 ▲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꼬회 교육회관. 1988년 개원 이래 피정과 각종 모임 등을 위한 도심 속의 영성 쉼터로 미사와 고해성사, 혼인예식, 공연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냥 옛스러운 건물인줄 알았는데, 역사적인 곳이었구나.

 

 

 

 

 ▲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 - 1226). 프란치스코는 1182년 이태리 아씨시에서 티어났다.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1205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했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형제회'가 시작되었다. 1224년 라베르나에서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 3일 밤 아씨시의 포르지운꿀라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조각상 설명문)

역시 종교인이 아니어서 그런가. 별 관심없이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사진만 남기기로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정동길을 걷다보면 교회와 성당이 많이 보인다. 그 이유는???? 당근 모른다. 우선 종교인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ㅎㅎ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삼정승을 지낸 최규서(崔奎瑞 1650~1735)에게 내린 영조의 어필(御筆) 편액을 보관하는 건물로, 안성시향토유적 사당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규서는 1728년(영조 4)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이인좌 등이 모의한 반란을 조정에 알려 난을 평정시키는 공을 세웠는데 이에 영조가‘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을 내렸다. 영조의 어필은 최규서의 집(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자리)에 어서각(御書閣)을 지어 보관하였는데, 1800년대 말 또는 1900년대 초에 집터에 다른 건물이 들어서게 되자 최규서의 묘가 있는 현재의 위치(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219-2번지)로 어서각을 이건하였다. 최규서 어서각은 정면 4.94m, 측면 3.7m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에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 쓰인 어필 편액(가로 140cm, 세로 55cm)과 최규서의 위패, 영정, 비망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천천히 걷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우리의 유적. 정동길에 이런 유적이 있는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번에는 이정표를 따라서 왼쪽으로 들어가보자. 목적지는 네델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대사관이 아니라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었다.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세자(뒤의 순종)와 함께 옮겨가 이듬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곳이다. 또한 아관파천(俄館播遷) 중에 친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는 등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건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탑부만 남아 있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는데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
조선 말기에 건축된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며, 탑은 3층의 벽돌 구조이다. 공사관 건물은 6·25전쟁 때 불타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는데,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1981년에 건물과 주변 조경을 재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전망탑은 회색 벽돌로 이루어졌는데, 탑 외부를 단장할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에 반원 아치의 출입구가 있으며, 2층은 벽면으로 처리하고 전망대 구실을 한 3층은 사방에 한 쌍씩 반원 아치 창문을 설치하고 위에 삼각형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의 아픈 과거가 있는 곳으로 역사 교과서에서 중요하다고 형광펜으로 강조 표시를 했던 아관파천의 장소가 바로 여기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렇게 탑만 남아 있다. 그런데 이 탑의 지하실이 덕수궁까지 연결됐다고 하니, 아마도 그 날 이 곳을 통해 고종이 오지 않았을까라고 혼자 상상해 본다.  

 

 

 

구 러시아 공사관에서 바라본, 정동그린공원의 모습. 일본식 정원같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구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정동길로 들어서니, 이화여자 고등학교가 보인다. 이 곳은 나에게 아픈(?) 추억을 줬던 곳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배정(뺑뺑이)에 이화여고가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은 000 9동이었는데, 그 곳에서 이화여고로 간 언니들이 참 많았다. 당연히 나도 갈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000 8동까지만 이화여고를 가고, 9동부터는 다른 학교로 배정이 됐다. 사전에 알았더라면, 주소를 8동으로 옮겼을 텐데 어떻게 한끗 차이로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는지, 참 가슴 아픈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내가 말아~ 저기가 내 모교가 될뻔 했는데..." 라면서 괜한 넋두리를 하곤 한다.

 

 

 

초입과 다르게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는 정동길이다. 돌벽도 보이고, 도로 폭이 좁아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 찍기도 편하고, 나홀로 다녀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도 없고 말이다.

 

 

 


 ▲ 2008년 8월 27일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되었다. 1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외벽은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쌓았다. 1975년에 지상4층으로 증축되었다.
구한말에는 세무총사(현재의 관세청에 해당) 사옥으로 쓰였고,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도르프의 사무실도 이곳에 있었다. 그 뒤 미국기업 싱어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 사무실과 그 상사원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 신아일보사에 매각되었다. 이후부터 1980년 10월 언론기관통폐합으로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되기 전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 사용되었다.
구한말의 파란만장한 역사와 함께 1980년 신군부 언론기관통폐합 조치로 언론수난사 현장을 대변하는 등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또한 당시 민간건물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철근 콘크리트조 건물로, 슬라브(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강점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 있어 근대건축의 기술사적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됐구나. 5공 시절에 말이다. 여기도 근현대사의 아픔이 있는 곳이구나. 정동길이 고즈넉한 이유가 바로 우리의 아픈 역사가 많아서일까?

 

 

 

중간쯤 왔을까? 쉬어가는 코스가 보인다. 전광수 커피하우스를 포함해서 4곳의 커피전문점들이 즐비해있다. 맛에 따라, 가격에 따라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될 듯.

 

 

 

시네마 정동은 없어졌지만, 정동극장은 여전히 있구나. 아쉽게도 여기서 공연을 본 적이 없다. 매번 저 입구를 들어갔다, 바로 나오기만 할뿐.

 

 

 

덕수궁 돌담길을 가려면 꼭 지나가야 하는 정동길 원형도로. 왼쪽 골목이 바로 덕수궁 돌담길이고, 중앙 골목은 서울 시립 미술관이다. 문화생활을 하고 싶다면, 미술관으로 더 걷고 싶다면 돌담길을 선택하면 된다.

 

 

 

뒤를 돌아서, 왼쪽 골목은 내가 내려왔던 곳이고, 오른쪽 골목은 덕수궁 후문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도 가운데 체크 표시된 곳이 바로 미국 대사관저이다. 높은 벽에 철조망에 경찰까지 저기도 우리의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인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TV에서 미국 대사관 부부에 대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대사관저가 나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곳이 저 곳인줄 몰랐다. 방송에서 대사관저의 모습이 나올때 기와부분에 미국 국기 문양을 얼핏 봤는데, 그 문양을 직접 보고야 말았다. 철조망 사이로 희미하게 말이다. 우리의 한옥 느낌으로 지은 곳이라고 하는데, 난 왜이리 더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광화문 연가, 난 아직 모르잖아요, 휘파람, 소녀 등을 만든 작곡가 이영훈의 추모비. 정말 너무나 좋아했던 이문세의 노래가 다 이분이 만든거였다니.
'당신이 있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버텨냈습니다. 감사합니다. 뭐 지금도 당신의 노래를 여전히 사랑하는 1인입니다'

 

 

 

서울 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보면 빨간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는데, 사라졌다.

 

 

 

요렇게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요즘 공중전화 찾기 참 힘들던데, 그래도 여기는 남겨뒀으면 어떨까 싶다. 나처럼 추억이 있는 분들이 참 많을텐데 말이다.

 

 

 

서울 시립 미술관. 피카소, 앤디워홀, 샤걀 등 유명 전시회가 있을때 마다 갔지만, 별반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나온다. 들어가서 3~4시간 동안 있는 사람들도 있던데, 난 1시간이면 완전 지루해진다. 작품을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런가. 르부르 박물관에 가면 좀 나아지려나.

 

 

 

덕수궁 돌담길이다. 저 코너를 돌면...

 

 

 

연인이랑 걸으면 절대 안 되는 덕수궁 돌담길이다. 이 길은 가을에 오는게 가장 좋다. 은행나무로 인해 멋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을씨년스럽네. 연인이랑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예전 이 곳에 가정법원이 있었다고 한다. 헤어지려는 부부들이 다 이 길을 걸었기에 그런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길을 걷고 헤어진 커플이 진짜 있을까?

 

 

 

다 왔다.

 

 

 

덕수궁 대한문. 간 김에 들어갈까 했는데, 지금 보다는 꽃피는 봄에 오는게 더 좋을거 같아 다음으로 미뤘다.

 

 

뻥을 좀 치자면, 100번 정도는 갔던 정동길이건만 그동안 놓치고 못 봤던 곳들이 너무 많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고 고즈넉한 멋이 있는 정동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의 아픈 역사가 많은 곳임을 새삼 느끼게 됐다. 더불어 사라짐은 아쉽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깐. 그 추억이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서울 촌년의 나홀로 서울 나들이 ep2 예고 - 장미여관 육중완으로 인해 유명해진 망원시장.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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