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은 흥미롭고 영상은 어려워~" 권진규의 영원한 집 & 건축의 장면 (in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남부순환로를 지나다니다 보면, 사당역을 앞에 두고 주변과 동떨어진 건물을 지나치게 된다. 멀리서 봤을 때는 시간이 멈춘듯한 오래된 건물이로구나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오래된 건물이자 미술관이다. 아니~ 이런 곳에 미술관이 있다니, 생뚱맞은 듯한데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이다. 원래는 여기가 아니었다는 스포를 먼저 날리면서, 권진규의 영원한 집과 건축의 장면 1+1 전시회다.


건물에 대한 소개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1층은 상설전시실로 권진규 작가의 기증작품으로 구성한 '권진규의 영원한 집'을 전시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흙을 만지기 좋아해 손재주가 뛰어난 권진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 이후 한일국교단절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을 어렵게 오가며 조각가로 활동했다.
그는 주로 인물이나 말, 닭 등의 동물 모습을 흙으로 구워 제작하는 테라코타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의 작품들은 작가의 정신적인 구도 자세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형상화한 것들이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은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시기의 오기노 도모, 새로운 조각, 동등한 인체와 서울 아틀리에 시기의 내면, 영감, 인연, 귀의 등 7개의 소주제에 맞는 작품과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은 모두 도모이지만, 시기가 다르다. 왼쪽부터 첫 번째는 1951년 일본 유학 시절 만난 후배 도모를 모델로 제작한 두상이다. 두 번째(1950년대)는 권진규의 연인인 도모를 모델로 제작한 작품이다. 세 번째(1960년대)는 작가가 한국에 돌아와 도모를 생각하며 제작한 두상이다.

나부는 작가가 일본에서 지내던 1955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여성입상, 보살입상과 함께 목조로 제작한 작품이다. 연인인 도모의 아버지로부터 공양상 제작을 의뢰받아 자신이 머무르던 곳 가까이에 있던 배 나무 밭에서 구한 나무로 작품을 제작했다.

기사는 1953년 제38회 니카전에서 특대를 수상한 작품이다. 직육면체의 돌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목처럼 말 등에 올라탄 기사의 팔과 다리, 머리가 정면에서 보인다. 그 반대편에는 말머리로 이어지는 기사의 팔과 다리가 묘사되어 있다.

마두B는 1953년 제38회 니카전에서 입상한 작품이다. 그의 일생에 걸쳐 온갖 양식으로 말을 제작했으며, 그 제작 기법 또한 석조, 테라코타, 건칠 등 다양하다. 원통형의 긴 콧마루와 쫑긋 세운 귀, 갈기 등 말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



자소상(1960년대)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큰 눈, 꽉 다문 입술 등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신의 모습을 마스크로 재현한 작품이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작가는 자신의 얼굴을 마스크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이마가 넓고 뒷면이 뚫린 형태이다.
마스크는 긴 코와 깊숙이 파인 눈, 광대뼈와 마른 턱 등 사실적인 묘사와 석고 틀의 이음새 자국을 그대로 남겨 표면을 거칠에 처리한 모습이 자소상과 유사하다.


자소상(1968)은 삭발한 머리, 강렬한 눈빛과 큰 귀, 굳게 다문 입, 약간 앞으로 나온 턱이 특징이다. 자신을 구도자처럼 표현한 이러한 자소상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영혼의 안식을 희구하던 내면세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흰 소는 이중섭의 작품 황소를 모본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작가는 1972년 3월 개최됐던 이중섭의 15기 유작전을 두 번 다녀왔는데, 여기서 작품 황소와 흰 소를 보고 크게 감동받았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고양이 머리(1960년대)는 고양이의 머리만 묘사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함흥에서 고양이를 기른 경험이 있는 그는 1965년경 여동생에게 받은 고양이를 기르며 드로잉도 하고 테라코타도 여러 점 제작했다.


왼쪽부터 선자(1967)는 이대 서양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선자를 모델로, 예선(1968)은 당시 신인소설가 신예선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그리고 경자(1967)는 홍익대 제작 최경자를 모델로 제작한 테라코타 작품의 틀을 이용해 1971년경 다시 건칠로 제작한 작품이다.

입산(1964-65)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인 일주문을 표현한 작품이다. 사찰로 들어가기 전 세속의 번뇌를 끊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건축물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작가의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자소상은 넓은 이마 중앙부에 약간의 머리카락을 덩어리로 표현했다. 코는 길고 입은 꼭 다물었으며 눈을 감은 모습으로 눈두덩이가 표현되었다. 광대로 내려앉았고 피부도 느슨해 보인다.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을 고안하지 않은 것으로 봐, 작가의 병세가 깊어진 1970년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건축의 정면은 시간성을 기반한 영상을 통해 기존의 건축 전시와는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한다. 전시는 유명 건축가나 건축물에 대한 영상은 배제함으로써, 사진으로 남기거나 방문해봐야 하는 소비 대상으로서의 건축물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창(관점과 태도)으로서의 건축에 주목하며 확장된 사고를 유도한다.

8명(팀)의 작가가 참여해 총 12점의 영상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건축과 영상이라 뭔가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역시나 어렵다. 특히 영상이다 보니, 사진 촬영이 애매했다. 안내문에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일상의 공간 속에서 맺어지는 관계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나아가 각자의 감독이 되어 자신만의 장면을 포착하는 색다른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솔직히 알듯 말듯하다.




박준범의 대피소 리허설은 '20명 정원의 대피소에 50명이 30일간 외부와 격리되어 거주하기'라는 조건을 설정하고 대피소 인근의 청년 6명이 주변에서 재료를 가져와 비상 상황을 대비해 공간을 구획하고 집기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리허설을 기록한 영상이다.
총 27분 22초로, 실제보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영상 속 인물들은 마치 코미디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들이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은 어린 시절 개미집 만들기를 들여다보았던 경험을 떠올리게도 한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처럼 리허설이라 완성 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은 원래 벨기에 영사관이었다. 벨기에는 1905년 회현동에 새로 영사관을 건립하지만, 그해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두 나라의 국교는 단절됐다.
벨기에 영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완전히 폐쇄됐고, 이후 이 건물은 요코하마생명보험과 기생조합인 본권번을 거쳐 일본 해군무관부 건물로 사용되었다. 해방 후, 해군 군악학교, 공군본부, 해군 헌병감실을 거쳐 1968년 구 한국상업은행의 방계기업인 대장흥업에 불하됐다.

이후 방치되다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11월 사적 제254호로 지정됐다. 그런데 구 벨기에영사관 터를 포함하는 일대가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건물은 해체 후 회현동에서 남현동으로 이전 복원됐다. 은행사료관으로 사용되다가, 2004년 5월 기업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우리은행에서 서울시에 무상 임대하면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층 기획전시실 건축의 장면은 6월 1일까지로, 새로운 기획전시 소식이 들려오면 다시 가볼 생각이다.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어렵지 않은 기획전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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