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 100년의 시간 "한국영화박물관"
영화도 좋아하고, 박물관도 좋아한다면서 영화박물관은 몰랐다. 지난달에 광고박물관에 다녀온 후, 혹시나 하는 맘으로 검색을 하니 영화박물관이 있다.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상암동에 있다. 몰랐으면 모를까? 알게 됐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한국영화박물관은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오늘날 한국 영화가 전 세계에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기까지 우리 영화 100년의 기억들을 담고 있다. 그나저나 한국 영화가 100년이나 됐다니, 놀랍지 아니한가~
책자는 없지만 로봇은 있다. 큐아이는 박물관을 소개하는 인공지능 큐레이터라고 할까나? QR코드를 인식하면 스마트폰을 통해 공간 및 전시물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사람이 많았다면 이 방법을 선택했지만, 운이 좋게도 지금 이 순간 관객은 나 혼자뿐이다. 큐아이가 들려주는 일반 문화해설(20분 소요)을 들으면 함께 관람을 했다.
황성신문 1901년 9월 14일 논설을 살펴보면, 황실어람이라 일컬어졌던 황실 영화관람의 시작은 미국 여행가 버튼 홈즈로부터 비롯된다. 1901년 한국을 방문한 버튼 홈즈가 서울의 여러 모습을 촬영했고 고종에게 활동사진을 보여줬다.
한편, 활동사진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시초는 1903년 무렵으로,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과 협률사(원각사)에서 활동사진이 공개 상영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세계영화사는 1800년부터라면, 한국영화사는 1900년부터다. 100년의 차이? 그때는 어머어마하게 느껴졌는지 몰라도 지금은 동년배(?)처럼 느껴진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당~
한국영화의 탄생 (1900년대 초 ~ 해방 전)
1900년 초에서 1919년까지 조선영화는 등장하지 않았고, 서구와 미국의 영화들이 수입되어 대중에게 소개됐다. 1919년 최초의 한국영화라 일컬어지는 '의리적 구토'가 만들어지는데, 이는 본격적인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 삽입된 연쇄극(키노드라마) 형식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첫 극영화는 1923년 월하의 맹세라는 주장과 1923년 국경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자본에 조선인 스태프만으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는 1924년 김영환 감독의 장화홍련전이다.
무성영화의 황금기를 연 나운규는 최고의 감독이자 스타였다. 그의 아리랑은 민족영화의 기원이자 조선영화의 미학을 확립한 영화로 평가되고 있는 한국영화사의 전설이다. 아리랑의 흥행을 기점으로 1930년대 초까지 조선 무성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성장과 중흥 (해방 후 ~ 1960년대)
일제 말기 전시체제를 거치며 영화제작시스템은 무너지고 기자재는 낙후되어 영화제작 여건은 최악을 맞이하게 된다. 해방 후 재정비에 돌입했지만, 1950년 전쟁의 발발로 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어려운 시절에도 해방 즈음에는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와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 전란의 와중에는 신상옥의 악야(1952)와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의 극영화가 제작됐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은 EBS에서 본 적이 있다. 같은 해 6월 7일 한국일보의 기사 "현대 풍속도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그 정확한 터치와 율동적인 수법은 현대 감각을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중간생략)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자유부인은 신문에 연재되며 교수의 춤바람으로 논쟁을 일으키는 등 큰 관심을 끈 정비석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때는 괴작일지 몰라도, 지금은 막장 축에도 끼지 못할 거다.
1960년대는 흔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 불린다. 1960년 92편이었던 제작편수는 1969년이 되면서 229편을 기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68년 관객수 역시 1억 7천만 명을 상회해 1인당 관람회수가 6회에 육박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영화산업 통계를 능가하는 수치로, 가히 영화의 시대였다.
대표작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주연 윤여정)와 고려장 /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성춘향 /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 김약국의 딸들 / 이만희 감독의 만추와 귀로 /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과 안개 / 정창화 감독의 노다지 / 정진우 감독의 초우 등이 있다.
암흑 속의 모색 (1970 ~ 80년대)
1970년대 한국영화는 쇠퇴와 불황의 시기로 기록된다. 1969년 229편을 기록했던 제작편수는 1975년 83편까지 곤두박질쳤다. 질적으로도 저예산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며 관객들로부터 외면까지 받았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며 급격히 보급되던 TV의 영향, 경제성장과 함께 다양해진 레저문화 그리고 더욱 엄혹해진 검열과 영화정책의 실패 등이 겹쳐진 결과였다.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하길종의 바보들의 향진 그리고 김호선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으로 대표되는 신인 감독들이 청년영화를 기치로 새로운 표현방식과 정서를 가진 영화를 만들면서 흐름을 주도했다. 70년대 후반에는 고교얄개와 진짜 진짜 시리즈와 같은 하이틴 영화와 액션영화가 관객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1980년대가 되어서도 불황은 계속 됐다. 영화 봄날의 봄에 등장하는 신군부의 정책으로 성에 대한 검열이 완화되면서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관객의 호응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불황의 늪에 빠졌지만 임권택, 이장호, 배창호, 이두용 감독 등이 자신의 영화세계를 꾸준히 펼치며 국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강수연 배우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한국사회가 민주화되고 소재의 제약이 사라지게 되면서 젊고 패기에 찬 감독들이 등장하게 된다. 박광수 감독의 철수와 만수와 그들도 우리처럼 /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과 경마장 가는 길 /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과 하얀 전쟁 /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과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등 이 시기 한국영화계를 대표한 감독들은 훗날 코리안 뉴웨이브라 명명되었다.
세계에 우뚝 선 한국영화 (1990년대 이후)
1990년대 한국영화는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한다. 비디오 시장이 확대되고, 케이블 TV가 출범하게 되자 삼성 등 대기업들이 콘텐츠 확보를 위해 영화산업에 진출했다.
결혼이야기는 당신 한국 멜로영화들의 신파성과 진부함에서 벗어난 새로운 양식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서 한국영화계에 참신한 파장을 몰고 왔다.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이 파트너로 이뤄 제작한 서편제는 서울에서만 100만 관객을 넘기며 한국 영화사의 새로운 기록을 달성했다.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신호탄으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등 종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영화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독특한 크리에이티브로 무장한 감독들이 자본과 연계되면서 지난 세기와 확연히 구분되는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창조해 냈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겸비한 이른바 웰메이드 영화는 대중의 관심과 호응을 끌어냈다.
2003년 실미도 이후 2020년까지 총 19편의 영화가 천만영화에 이름을 올렸다. 2022년 범죄도시2와 2023년 범죄도시3, 서울의 봄 그리고 2024년 파묘까지 더하면 23편이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산업의 양적 성장, 미학적 성취, 글로벌 영화로서의 지위까지 획득하며 그야말로 한국영화 역사상 유례없는 르네상스 시대를 만들었다.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나의 아저씨 이제는 진짜 안녕~"
한국영화 100선
한국영상자료원은 2013년 국내 대표적인 영화사연구자, 비평가, 영화인들의 설문을 거쳐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100선(동률로 101편)을 선정했다.
선정의 기준은 한국영화 초창기부터 2012년까지 개봉한 현존하는 장편 영화 중,
1.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
2. 당대의 대중 의식을 반영했거나 한국사회의 독특한 맥락에서 제작되어 사적 연구 가치가 놓은 작품
3. 장르적 혹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 등이다.
101편은 그 자체로 높은 완성도나 예술성을 가진 작품들이지만 한국영화 100년의 시간을 증거하는 빛나는 순간들이라 할 수 있다.
100년이나 늦게 시작했지만, 아카데미를 로컬 시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영화는 그들이 부러워할 만큼 엄청난 성장을 했다. 70~80년대 엄혹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갈까 걱정도 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깐.
영화의 아버지는 뤼미에르 형제라면 영화의 어머니는 누굴까? 더불어 기획전시 대사극장까지 목요일에 업로드됩니다.
2024.02.15 - 공익광고만 원 없이 봤네! 한국광고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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