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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다시는 이런 분이 나올 수 있을까?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했으며, 전 재산 600억(현재 시세)을 조국 독립을 위해 올인 한 인물, 우당 이회영선생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문가이자 당대 최고 재산가였던 우당 이회영선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이다. 그런데 국정교과서가 되면, 우당 이회영선생은 전혀 거론되지 않을 거 같다. 아무리 철판이 두껍다고 하지만, 자신들과 너무 비교되기에 도저히 담을 수 없을 거 같다. 자신들은 힘 없는 백성 등 쳐먹고,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재산을 모았으니 말이다. 우당 이회영선생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어원은 이렇다.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의 도시 '칼레'는 영국군에게 포위당한다.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을 하게 된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된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한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처했던 시민 여섯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다. (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위키백과에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2015.04.29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저명인사나 소위 상류계층의 병역기피가 매우 오래된 병폐로 잔존하고 있다. 정훈이라고 하여, 군인 정신교육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매우 강조하고 있으나 고대 로마와 로마를 따라하는 미국처럼, 법률 명칭이나 공공시설 명칭 등에 귀족의 이름을 붙여서 "혜택"을 부여하거나 해서, 귀족계층 내부의 유행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다.

강력하게 수정을 요청하고 싶다. 우리나라에도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선생이 있다고 말이다.

 

우당 기념관 관람시간은 평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이며, 일요일 공휴일은 휴무다. 관람료는 무료다.

 

우당 이회영선생과 5형제

우당 기념관은 중국으로 망명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운 우당 이회영선생 및 형제(건영, 석영, 철영, 시영, 호영)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한 애국열사 동지들을 기념하는 곳이다.

우당 선생 6형제와 가족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막대한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한 후 전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무장독립 투쟁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중국에서 아나키즘 운동과 비밀결사 다물단,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여러 방면의 조직을 통해 저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우당 선생을 비롯해 많은 분이 중국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이 기념관을 세워 우당 선생과 동지들을 대의와 업적을 기린다.

 

기념관 입구에 있던 안내문을 읽으면서, 우당 이회영선생은 물론 5형제 그리고 함께 싸운 동지들까지 많은 분들에 대해서 알 수 있겠구나 했었다. 그런데 과하면 탈이 난다고 했던가?

 

이회영(李會榮, 1867년 음력 3월 17일(양력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오성과 한음에 나오는 오성 이항복의 후손이자, 명동성당 일대의 땅을 대부분 소유한 거부였다. 그리고 여섯 명의 정승과 두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으로 조선 최고의 명문가인 삼한갑족으로서의 명예와 당대 최고 재산가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의 형이며, 정치인 이종찬, 이종걸은 그의 손자다.

 

이렇게 엄청난 가문에 재산가였다면, 굳이 친일을 안해도 일제가 알아서 형님이라고 모셨을 거 같은데, 역시 명문가는 달라도 다르다. 지금 명문가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회영선생처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무서움에 말도 못하고 그저 벌벌 떨고 있을 거 같다. 아니면 했던 말, 다시 바꾸는 신공을 펼치고 있을 거 같다.(마음의 소리)

 

우당 기념관의 전체 모습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렇게 말하는 게 너무 죄송스럽지만, 여백의 미가 많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당 이회영 선생에 대한 업적을 자세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쪽 벽면을 채운 연혁뿐이었다. 또 선생과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신문기사를 크게 확대해서 전시해 놓고 있었다. 여기에 선생과 함께 싸운 동지들은 인물 사진뿐이었다. 사진과 함께 간략한 설명이 나와있지만,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다면, 이 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업적이 있는지 간략 설명만으로는 너무 부족했다.

 

게다가 전시되어 있는 기념물들의 설명이 너무 미비해서 한자를 모르는 나의 무식함을 탓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역사를 위해 찾아오는 한자를 모르는 나와 같은 어른이나 어린 학생들을 위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 기념관을 다녀봤지만, 여기만큼 어려운 기념관은 처음이었다. 기념관을 다녀온 후, 선생에 대해 기념관 홈페이지, 백과사전, 신문기사 등 나머지 공부를 한 후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우당 이회영 선생 대형 사진.

우당 이회영은 1867년 음력 3월 17일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유승과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성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이다. 7형제 중 넷째 아들로서. 위로는 세 형인 건영, 석영, 철영이 있었고, 아래로는 동생인 시영(초대 부통령)과 여동생 2명이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소영, 호영이 태어났다.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개방적인 성격이어서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거나, 나아가 남의 집 종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선생이 망명을 하고자 했을때, 집에 있던 노비문서를 다 없앴다. 그런데 자유가 된 노비들 중 대부분은 선생과 함께 중국 망명길에 올랐고, 선생은 그들에게 이제는 노비가 아니므로,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우당선생이 어떤 분인지 이 일화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다물단) - 신흥무관학교 교직원과 졸업생이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을 준단원으로 하여 1913년 3월 류허 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 다화셰[大花斜]에서 조직된 일종의 신흥무관학교 동창회 성격을 띤 혁명결사단체이다.(왼쪽)

 

신흥무관학교 교가 (오른쪽)

< 1절 >
서북으로 흑룡대원 남의 영절의 / 여러 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들 품에다 품어 / 젖먹여 기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조상들이라 /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 좔좔좔 결치며 돈다

< 2절 > 
장백산 밑 비단같은 만리낙원은 / 반만년래 피로 지킨 옛집이어늘
남의 자식 놀이터로 내어 맡기고 / 종설움 받는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자손들이라 / 가슴치고 눈물 뿌려 통곡하여라 / 지옥의 쇳문이 온다

< 3절 >
칼춤추고 말을 달려 몸을 단련코 /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 새 나라 세울 이 뉘뇨
우리 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 우리 청년들이라 / 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 자유의 깃발이 떴다.

 

우당 이회영 선생과 독립운동가 동지들 (121명). 한 분, 한 분 알고 싶은데, 이눔의 무식함때문에... 죄송합니다.(마음의 소리)

 

국민에게 고하는 글(이시영 선생이 부통령직을 사직하면서) / 독립을 위해서는 먼저 백성을 깨우쳐야 한다라는 우당선생 말씀 휘호.

국민에게 고하는 글

단기 4282년(1948) 7월 20일 뜻밖에도 나를 초대부통령으로 선임했을때에 나는 그 적임이 아님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것이 국민의 총의인 이상 내가 사퇴한다는 것은 도리어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심사원려(沈思遠慮) 끝에 받지 아니치 못하였다는 것을 여기에 고백한다. 그뒤 임연3년 동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대체로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부통령의 중임을 맡음으로써 국정이 얼마나 쇄신되었으며 국민은 얼마나 혜택을 입았던가. 뿐만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 부통령의 임무라면 내가 취임한지 3년동안에 얼마만 한익찬(翼贊)의 성과를 빛내었던가. 하나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야말로 시위소찬(尸位素餐)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나 한 사람의 무위무능에 있었다는 것을 국민 앞에 또한 솔직히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매양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일을 하도록 해줌으로써 사람의 적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 만약에 그렇지 못할진대 부질없이 허위(虛位)에 앉아 영예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자리를 깨끗이 물러나가는 것이 떳떳하고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정부에 봉직하는 모든 공무원 된 사람으로서 상하 계급을 막론하고 다 그러려니와 특히 부통령이라는 나의 처지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하여금 더구나 무위케 만들어, 이 이상 고위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참괴(慚愧)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국가가 흥망간두(興亡竿頭)에 걸렸고 국민이 존몰단애(存沒斷崖)에 달려 위기간발(危機間髮)에 있건만, 이것을 광정(匡正)하고 홍구(弘救)할 충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樑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가면 쓴 우국 위선자들의 도량(跳梁)으로 말미암아 초야의 은일(隱逸)이 비육(髀肉)의 탄식(嘆息)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이니, 유지자(有志者)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정부 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재가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다가 탐관오리는 도비(都鄙)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표실(表失) 케하여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시의 존엄을 모독하니,이 어찌 신생국민의 눈물겨운 일이 아니며 마음 아픈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것을 그르다 하되 고칠 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위(官位)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 오류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그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더구나 이렇듯 관기가 흐리고 민정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 않을 것인가. 그러한 나인지라 나는 이번 결연코 대한민국 부통령의 직을 이에 사퇴함으로써 이 대통령에게 보좌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씻으려 하며, 아울러 국민들 앞에 과거 3년 동안 아무 업적과 공헌이 없음을 사(謝)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는 일개 포의(布衣)로 돌아가 국민과 함께 고락과 사생을 같이하려 한다.

그러나 내 아무리 노혼(老昏)한 몸이라 하지만 아직도 진충보국의 단심과 열성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는지라,여생을 조국의 완전 통일과 영구독립에 끝긑내 이바지할 것을 여기에 굳게 맹세한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은 앞으로 더욱 위국진층의 성의를 북돋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여 주시었으면 흔행(欣幸)일까 한다. (출처 - 성재 이시영 선생 60주기 추모 학술회의 자료)

 

망명 후, 독립기지 선정을 위해 토론하고 있는 우당 이회영 선생 6형제.

조선시대 여성은 재가를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당 선생은 남편을 잃은 자신의 누이 동생을 거짓으로 부고는 낸 뒤 다시 결혼을 시켰다고 한다. 앙반가의 자제로 유년기에 한학을 배웠지만, 개화사상을 접하면서 기독교(감리교)로 개종을 했다.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지만, 참 멋진 남자다.

 

신흥무관학교 및 북경시대의 애국지사

한 분, 한 분 다 불러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조계진 여사 및 조정구 대감, 가족사진, 소거 이규학 선생과 조계진 여사가 걸어온 길.

 

조계진(1897년 - 1996년 12월 21일)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조정구의 딸이다. 운현궁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며,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경기여고를 7회로 졸업하였으며, 이 무렵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혼인하였다. 이어 얼마지나지 않아 3·1 운동 발발 직전에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비밀연락원으로 활동하다 1945년 귀국했다.1996년 12월 21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우당 선생 혁명열사증명서 - 한국인 중 중국 정부로 받은 유일한 훈장

 

2010년 KBS에서 방영된 우당 이회영선생을 그린 드라마 포스터.

 

우당 선생은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조정의 고관이었던 이상설(李相卨)과 당시 대한제국 외무부 교섭국장인 친동생 이시영(李始榮)등과 함께 을사 보호 조약 철회, 무효화운동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바로 나인영(羅寅永), 기산도(奇山度) 등과 함께 조약체결에 가담한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암살을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안창호, 이갑, 전덕기, 양기탁, 윤치호, 안태국, 이상재, 김규식, 이동녕, 김홍량, 이동휘, 신채호, 최광옥, 이시영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新民會)를 결성, 조직하여 신민회 중앙위원에 취임하고 교육, 계몽,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는 신민회의 정치·경제·교육·문화 분야 등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를 탄압했고, 신민회 회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출처- 위키백과)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12월, 6형제는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였던 이회영이라 한다.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였으며, 대가족이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그 당시 처분한 재산은 40만원. 지금 시세로 따지면 600억원이었다. 급하게 처분하느라 제 값을 받지 못한 것까지 계산하면 대략 2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상룡, 허위의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온 가족이 독립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다.(출처 - SBS뉴스)

 

선생 일가는 지린에 정착하여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 운동을 위한 기반 닦기에 들어갔다. 당시 위안스카이가 이회영 일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한인 토지 매매를 후원했다고 한다. 선생은 전 재산을 들여 만주에 세운 학교가 바로 '신흥무관학교'다. 그 곳에서 길러낸 3,500여명의 독립군은 척박한 만주 땅에 자리 잡은 독립투쟁의 뿌리가 되었다.

 

주변의 눈을 피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독립군 병사 양성을 도모했다고 한다. 땅을 사고, 학교를 짓고, 모든 학생의 식비와 학비를 전액 무료였다고 한다. 이는 더 많은 독립군들을 길러내고 그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선생의 마음이었다. 그 많던 돈은 곧 끝이 보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농사는 흉작이었다. 그 결과 선생과 가족들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루에 죽 한끼조차 먹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운동의 세월은 가난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1932년 11월 우당 이회영선생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는 조선인들의 제보와 일본 밀정의 첩보, 그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 등의 밀고때문이었다. 11월 17일 이미 노인이었던 선생은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5세였다. 연락을 받고 시신을 찾으러 간 유가족에게 다롄 수상경찰은 그가 자살하였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고 한다.

 

선생뿐 아니라,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뒤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 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다섯째 이시영(1869~1953)뿐이었다. (출처 - 경향신문)

 

슬프고 아픈 근현대사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선생이 있다는 건만으로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다.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가문에 큰 빚을 졌다. 해방이 되면 반드시 보상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보상은 전혀 없었다. 친일파가 실세가 된 세상이 됐으니깐 말이다. 거꾸로 가고 있는 시간을 다시 돌려 놓고 싶다. 그러므로 국정교과서는 절대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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