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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손목터널 증후군으로 인해 스마트폰 겜을 관뒀더니, 책 읽는 시간이 겁나 많아졌다. 매월 리디북스에 6,500원을 결제하고 있는데, 요즘은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일주일에 한 권으로 나름 목표까지 정하고 전자책 삼매경 중이다.

갑질의 우울함을 날려버릴 소재로 스파이 소설을 골랐다. 도로시 길먼의 '뜻밖의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출판사 북로드)이다. 제목만 보면 스파이물이 확실한데, 부인은 또 뭘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또는 오베라는 남자와 비슷한 계열인 거 같은데, 스파이가 주는 강렬함에 책장을 넘겨 아니 터치했다.

시대는 1960년 후반 아니면 70년대로 추정된다. 스마트폰, 인터넷 이딴 건 전혀 없고, 전보가 나오고 공산당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가 끝나기 전으로 스파이가 가장 많이 활약했던 시대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폴리팩스 부인은 60대로 할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다. 혼자 살고 있지만, 여기저기 다양한 봉사활동으로 사교성이 매우 훌륭하다. 그런데 우울증을 앓고 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꼭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하신 일은 없습니까?"  폴리팩스 부인은 의사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는 스파이가 되는 게 꿈이었지." (본문 중에서) 설마 했다. 스파이가 폴리팩스 부인을 뜻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스파이라는 인물이 따로 나오고, 우연히 그와 만나 어떤 일로 엮이게 되고, 그를 도와주는 역할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거 같다. 

 

그녀의 오랜 꿈은 스파이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스파이가 될까? "너 스파이 할래" 하고 누가 찾아오지는 않을 거다.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직접 CIA 본부가 있는 워싱턴으로 간다. 그리고 당당하게 "혹시 스파이 필요 없으신가"라고 물어본다. 와우~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기립박수를 칠 뻔했다. 현실은 다르겠지만, 폴리팩스 부인은 그녀가 꿈꾸던 스파이가 된다. 스파이라는 카테고리에서 가장 강도가 낮은 스파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누군가에게서 물건을 받아 가져오면 되는 운반책을 맡게 된다.

"부인은 8월 3일 멕시코시티에 도착해서 레포르마 인터컨티넬탈 호텔에 체크인을 하게 됩니다. 한 시간 전에 부인의 성함으로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거기서 부인은 3주간 멕시코에 머무르는 에밀리 폴리팩스 부인으로, 여느 여행자와 똑같이 행동하시면 됩니다. 어디로 갈지는 알아서 선택하시고요. 혼자 돌아다니시면서 평범한 관광객들이 가는 장소를 구경하시면 되겠지요. 부인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가시면 됩니다만, 8월 19일에는 실수 없이 멕시코시티의 카예엘 세글로에 있는 이 서점을 찾아가셔야 합니다." (본문 중에서)

여기까지는 소설의 초반이고, 분량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쉽게 끝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역시 사건이 꼬였고 그녀는 포로가 되어 알바니아 어느 요새에 진짜 스파이와 함께 갇히게 된다. 빅재미는 이제부터다. 여기서부터 역시나 어른폰을 놓지 않고 순삭으로 책을 읽어버렸다.

 

스파이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연륜과 경험은 그녀가 갖고 있는 최고의 무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처럼, 자신을 가둔 사람들과 친해지더니, 혼자서 탈출계획을 세운다. 진짜 스파이(패럴)조차 그녀의 계획을 무시했지만, 하나둘씩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동참하게 된다. 탈출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탈출을 시도하고 도망가는 전 과정이 책을 읽고 있는데 영상 지원이라도 되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한 가지, 갇혀있으니 화장실은 요강으로, 샤워나 세수는 가당치도 않았기에 요부분은 상상하지 않았다. 책에서도 자세하게 묘사를 하지 않았다.

폴리팩스 부인은 절벽에서 보낸 밤을, 염소 떼를, 롤스로이스를 타고 벌였던 추격전을, 옥수수 밭에서의 총격전을, 모터보트가 보내는 파도에 자꾸만 몰 속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한나절을, 통나무를 타고 스코터르 호수를 건넜던 밤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본문 중에서)

막판에 엄청난 반전을 예상했지만, 끝내 반전은 없었다. 하지만 스파이 폴리팩스 부인은 007보다 더 멋지게 업무를 수행했다. 늘 들고 다녔던 물건의 정체는 초반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죽었던 사람을 살렸고, 죽을뻔한 사람을 살렸고, 여기에 귀중한 정보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일을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을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혼자서 외쳐야 할텐데, 우울증은 치료됐지만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하는 병에 걸릴 거 같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스파이를 계속 하는 거.

검색을 하니,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가 더 있다. 이번에는 어디에서 어떤 스파이가 됐을지, '폴리팩스 부인과 꼬마 스파이'를 읽어야겠다. 소설이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꿈이 있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 이 나이에 나도 스파이가 됐잖아."

 

어차피 결말은 우리편의 승리로 정해져 있고, 이야기 흐름 역시 전작과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서 계속 읽게 되는 거 같다. 이번에는 어떤 에피소드일까? 궁금증에 읽기 시작해,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뜻밖의 스파이, 미션 이스탄불 그리고 꼬마 스파이 중에서 가장 잼나게 읽은 건, 미션 이스탄불이다. 등장 인물이나 사건이나 정말 쫄깃쫄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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