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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처음본다.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이래야 하는데, 그래야 어리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 전부 다 드라마에서 본 거라고 하면 될까? 물론 드라마에서 본 것들이 더 많지만, 직접 사용해봤던 것들도 있다. 지금의 서울과는 너무나 다른 1960~70년대 서울의 모습, 청계천 판잣집 체험관이다.



청계로는 기억이 나는데, 솔직히 판잣집은 몰랐다. 달동네 판잣집은 들어봤지만, 서울의 도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에 판잣집이 있었다니, 에이 설마했다. 지금은 이렇게 체험관이 되었지만, 1960~70년대 청계천변에는 무수히 많은 판잣집이 있었다고 한다. 보고 있는데도 참 낯설다. 뒤로 보이는 고층빌딩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판잣집이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혜택을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음...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똘이장군과 우뢰매는 얼핏(?) 본 거 같다. 



판잣집 첫번째 코스는 추억의 교실이다. "슨생님~ 하늘에서 눈이 와~~~요." 딱 봐도 봉숭아 학당이다. 



그때는 다같이 쥐를 잡았단다. 지금도 쥐를 잡아야 하는데...



모양은 다르지만, 3학년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연필깎이를 받았었다. 중학생이 될때까지 보물인냥 애지중지했지만, 샤프와 볼펜을 알게 된후 서서히 잊혀진 물건이 됐다. 주판학원은 필수, 피아노학원은 선택이던 시절이 있었다. 전자계산기가 다 해주는데, 왜 주판학원을 다녔을까? 앞날을 예지했는지, 학원을 땡땡이 친 적이 많았다. 잦은 땡떙이에는 매가 약인 법, 주판으로 참 많이도 맞았었다. 풍금에 타자기 그리고 만화 공책들까지 다 아는 물건들이다. 하긴 국민학교 세대이니, 모른다고 잡아뗼 수는 없을 거 같다.



"3번 테이블 숙녀분이 신청한 클리프 리처드의 썸머 헐리데이 나갑니다~" 난 신당동 떡볶이 DJ가 생각나지만, 이전에는 다방에 가면, 뮤직박스가 있고, 그 곳에는 장발을 한 느끼한 디제이가 있었다.



무엇에 쓰던 물건일까요? 3초 안에 대답하세요. 지금과 달리, 그때는 홍보물로 최고.



보니 타일러, 올해로 만 63세란다. 그리고 한국의 마이클 잭슨 박남정.



음악다방을 지나 구멍가게로 이동. 요즘은 편의점이 대세지만, 그때는 어느 동네를 가도, 아주 작은 구멍가게들이 하나씩 있었다. 참 협소한 곳인데, 왠만한 물건은 다 있는 화개장터스러웠다.



가위질을 못해, 늘 목을 댕강 자르고 말았던 종이인형. 저게 뭐라도 고이고이 모셔두고 손도 못대게 했던 딱지. 요즘 딱지는 재질도 많이 바뀌고, 엄청 세련됐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딱지는 계속 유행 중인 거 같다. 



예전에 설탕을 저렇게 팔았었나? 전지분유 타 먹으면 엄청 맛있는데, 매를 부르는 짓이지만, 그 맛을 알아버려서 몰래몰래 먹었었다. 대형 설탕과 달달한 분유 그리고 달기만 했던 불량식품들까지 요즘 음식이 전반적으로 달아진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학교 끝나고 너무 놀았다. 이제는 공부를 좀 해야겠다.



공부를 하려고 했더니, 밥부터 먹으란다. 이래서 독방이 필요한데, 단칸방에서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 "단칸방에 살아도 서울대 갈 눔은 잘만 간다." 여기 음성 지원이 되는 곳이었나? 괘종시계 옆에는 언제나 가족사진이 있었고, 성냥불을 넣으면 지익~ 하면서 불이 켜졌던 곤로, 냄비밥 진짜 맛있었는데... 겨울밤, 화장실까지 갈 필요없이, 요강만 있으면 만사오케이. 



엄마가 시집때 해온 목화솜 이불이야 하면서 보여줬던 적이 있었는데, 참 많이 비슷하다.



여기는 전시체험관. 



그때 물품들과 그시절 영화 포스터가 있는 곳이다.



60~70년대 교복과 교련복. 직접 입어볼 수 있다고 한다. 그때에 비해 요즘 교복은 정말 세련되고 진화했다.



또리만화방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만화는 역시 최고다.



마음 약해서, 맨발의 청춘은 본 기억이 있는데, 마부는 모르겠다. 어릴때 테레비로 봤던 추억의 영화들. 얄개시리즈도 참 좋아했는데...



그런데 왜 왜 왜 청계천에 판잣집이 생겼을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맞은편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두 곳다 입장료는 없다. 판잣집만 봐도 되지만, 왔으니 박물관도 함께...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 그 중심을 가로지르던 개천, 이때만 해도 이곳은 맑고 깨끗한 하천이었다. 1914년경 실시된 하천조사로 개천은 청계천이라는 새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맑은 계곡 물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청계천은 날이 갈수록 더러워졌다. 인구와 산업시설의 증가가 주원인이었다. 일제의 수탈적 농업정책으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향하는 이농 인구가 늘어났으며, 신식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에 들어오는 젊은이들도 많아졌다. 또 방직공장, 고무공장, 유기공장, 염색공장 등 근대적 산업시설들도 도성 내외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청계천에는 생활하수 외에 산업폐수까지 흘러 들었고 그 양도 이전 시기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로 인해 청계천변 주민들의 전염병 발병률은 서울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청계천 하류 제방 위 곳곳에 토막들이 들어섰다. 해방 직후에는 전재민들이, 한국전쟁 이후에는 월남민들과 상경민들이 청계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런데 판잣집은 무허가였다. 빽빽이 들어선 판잣집에 불이라도 나면 순식간에 몇채가 사라졌지만, 다음달 다시 새판잣집이 세워졌다고 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는 도시 미관과 위생상태를 개선하여 현대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 무허가 불량주택들을 본격적으로 철거하기 시작했다. 서울 외곽에 대단지를 조성해서 철거민을 집단이주시키고, 무허가 불량주택 일부는 개랑하여 양성화하는 한편,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대량 건설한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서울의 수치로 여겨졌던 천변 판잣집들은 사라졌으나, 그 대신 봉천동, 신림동, 난곡동 등 서울 변두리 산비탈 여러 곳에 달동네들이 생겨났다.


1967년 127만명의 주민을 서울시 밖으로 이주시키겠다는 구상 아래 경기도 광주군에 대규모 철거민 이주단지를 조성했다. 상하수도 등 생활기반시설을 제대로 갖추기 못한 채 진행된 이주정책으로 각종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주민들의 생활고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많은 이주민들이 주로 서울로 일을 하러 가야 했는데, 교통이 불편해 서울 시내를 왕래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게 바로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이때 대통령이 누구였드라?


개천에서 청계천으로, 청계천에서 청계로로, 청계로에서 다시 청계천이 되었다. 그 시작을 민선 3기 시장이 했다는 게 맘에 안들지만, 복원후 10년이 흘렀다. 처음에는 보여주기식 정책(연간 수십억원을 들여 한강물을 끌어다 쓰는 인공 하천)으로 서울쥐는 더 큰 쥐가 됐지만, 그로 인해 녹조라떼가 생겼다. 청계로보다는 청계천이 되어 좋지만,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는 진짜 청계천이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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