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고운 세상을 기다리며... (임진각 평화누리, 캐논 400D)
태어나서 처음으로 봤던 연극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중학교 때였다. 가장 존경했고 좋아했던 담임선생님이 현장학습(?)의 일환으로 연극 관람을 했던 거 같다. 정치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시절이지만,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던 세상이라, 이런 연극을 보게 했다고 하면 아마 학교측에서 뭐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은 과감히 우리를 데리고 연극을 보게 해주었다. 후폭풍에 대해서 들은 바가 없어 모르지만, 시말서를 작성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한창 시끄러웠던 전교조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전교조가 뭔지 전혀 몰랐기에, 선생님이 큰 잘못을 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문을 잠그고, 담임선생님을 포함 전교조에 가담한 선생님들의 출입을 막았던 장면을 목격한 후, 이건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우리에게 더 없이 좋은 선생님을 왜 못 만나게 하는지, 아직 학생운동이나 데모 같은 걸 몰랐던 시설이기에, 그저 교문을 사이에 두고 선생님과 같은 반 친구들은 그저 울기만 했었다.
몇 년이 지나고 선생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외모(드라이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는지 늘 부스스한 앞머리에, 유행과 전혀 상관없는 잠자리안경에, 여자임에도 전혀 여성스럽지 않은 옷만 입었던 걸로 기억되기에^^)만 보면 결혼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에 아이까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당황했지만, 그 아이는 참 올바르게 자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전혀 몰랐던 시절에 당했던 그 날,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을 텐데.
그 해 선생님은 아직 어린 제자들을 두고 본인의 의사와 달리 학교를 떠나셨다. 그런데 난 그 선생님을 가장 존경한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도, 이 연극을 과감히 교육의 일환으로 단체관람을 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출처 - 다음 검색)
연극을 보고 난 후, 책과 영화로 다시 보게 되었지만, 중학생인 나에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연극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같은 반 친구는 물론 선생님까지 자기 부하(?)로 만들어 버린 엄석대, 그야말로 독재이자 공포 그 자체였다. 동갑내기 친구이건만, 석대는 그냥 친구가 아니었다. 높은 분이셨다. 선생님들까지 석대의 이런 모습을 눈 감아주니, 아이들의 석대의 공포정치에 불쌍한 희생양일 뿐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병태라는 한 아이가 전학을 온다. 서울 출신이기에 석대에서 희생당한 아이들은 그를 보면서 작은 희망을 품게 된다. 왜냐하면 병태는 석대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고쳐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만 올바른 길로 가려고 노력하며 할수록, 세상은 정 반대로 흘려갔다. 석대의 잘못을 잡기 위한 병태의 노력은 하나하나 물거품이 되고, 서울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기대했던 아이들은 다시 석대의 공포정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이들의 희망인 병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선생님이었지만, 그들도 석대의 공포정치를 좋아했던 지라, 병태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다.
왕따가 되어 버린 병태, 그때 유혹의 손길이 다가온다. 다른 아이들처럼 석대의 노예가 될 처지에 놓인 병태에게 '노예보다는 책사가 어때?'라는 달콤하고 은밀한 유혹이었다. 석대에게 있어 서울출신이라는 병태는 놓치기 아까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집에 돈도 좀 있고, 공부도 잘하고, 서울물까지 먹은 녀석이니 다른 아이들보다 다른 대우가 필요했던 법.
석대의 세상에서 섬처럼 혼자 살 수 없던 병태는, 은밀한 그 제안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석대의 품 안에서 세상을 가진 자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일년 후, 석대의 세상에 태풍이 왔다. 새로 부임한 선생님의 막강한 권력이 석대의 세상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석대의 손이 되고, 혀가 되고, 발이 됐던, 부하(?)들부터 석대를 떠나가게 된다. 병태가 가장 먼저 새로운 선생님 품으로 갈거라 생각했는데, 가장 오랫동안 석대의 세상에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에 불이 난다.
살짝 내 식대로 표현을 좀 다르게 했지만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줄거리이다. 인상 깊었던 몇 장면이 기억이 난다. 새로 부임한 선생님으로부터 자꾸만 자신의 세상이 무너지는 걸 참지 못해, 아이들에게 한바탕 욕을 퍼붓고 교실을 나가버린 석태의 모습과, 새로운 물결을 가장 먼저 원했던 병태가 그 변화의 바람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학교에 불이 난 장면이다.
요즘 세상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석대의 세상에서 병태의 존재는 눈에 가시였다. 그러나 필요한 존재이기에, 살살 달래서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어떠한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해주고, 눈 감아 준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약간의 리스크는 감수해야 하는 법이니깐. 그런데 가끔 자신의 권력에 태클을 거는 똘마니가 나오게 되면, 가차없이 밟아 버린다. 본보기처럼 무섭게 짓밟아버린다. 마치 '니들도 이렇게 될 수 있으니 가만히 있어.'라고 말하는 거처럼.
석대의 세상이 계속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알아도 모른 척 눈감아 준 선생님이다. 굳이 본인이 아이들에게 훈육을 할 필요도 없고, 석대에게 모든걸 다 위임하면 타이틀만 선생이지 그저 놀고 먹기 딱 좋은 신선놀음이니 싫어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뭐, 가끔 석대가 좀 심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게 다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하고 쿨하게 넘겨버린다.
그러나 석대의 세상은 끝이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지만, 분명히 끝이 있었다. 그럼 지금의 세상도 그 끝이 있을까? 몇 년 전 그 끝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예전과 달라졌다면 더 과감해졌고, 대담해졌으며, 패션에만 복고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젠 세상이 복고다. 디지털 복고라고 해야 하나? 세상이 변했으니, 복고도 시대 흐름에 맞춰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색동옷을 입었다. 직접 손에 피를 묻혀야 했던 아날로그에서 이제는 보이지 않게, 그러나 아주 깊숙이, 곳곳에 퍼져있는 디지털로 아까운 피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흔적을 없애야 하는데, 조금씩 남긴다. 석대가 아이들 앞에서 가차없이 한 놈만 짓밟았던 거처럼 말이다.
석대 그리고 병태, 새로 부임한 김선생, 석대의 행동을 눈 감아준 선생님, 석대의 종이 됐다가 가장 먼저 배신한 아이, 무서움에 덜덜 떨고 있는 반 아이들. 이 세상과 너무나 닮아 있는 거 같다. 석대가 자신의 세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학교에 불을 지르는데, 요건 안 닮았으면 좋겠다. 재가 되어 버린 학교를 다시 세우려면 많은 돈이 들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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