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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마시면서 수다 떨기 참 좋은 소재

 

일요일 저녁 8시쯤,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빠르게 걸으면 집까지 35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지만, 이상하게 버스를 타고 싶었다. 아마도 헌팅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인 듯.

 

한적한 버스였는데, 나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는지 평일 퇴근시간도 아닌데, 순간 만원 버스가 되어버렸다. 사람들 틈에 낑겨서 탔으나, 내 자리는 버스 좌석 두번째 자리 부근이었다. 앞에 한 사람이 더 있어서, 손잡이 윗부분을 잡으면서 그렇게 멍하니 버스 밖 풍경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있던 여성분(60대 초반으로 추정, 그녀라고 칭함)이 갑자기 빈 의자도 없는데 자리에 앉으려는 포즈를 취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성분(60대 초중반으로 추정, 그라고 칭함)이 당황해서 본인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일어섰는데, 그녀는 괜찮다고 하면서 의자가 아닌 곳에 앉아 버렸다.

 

내가 탄 버스는 신형 버스로 첫 번째 좌석이 엄청 높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첫 번째 좌석과 두 번째 좌석 사이에 의자라고 하기 뭐하기지만 낑겨 앉으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대체적으로 두 번째 좌석에 앉은 사람이 다리를 올려놓거나, 우산 또는 가방을 올려 놓는 공간으로 이용하는데, 그녀는 의자로 이용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와 그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 좁은 공간을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앉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앉을 수 없는 곳에 그녀는 엉덩이를 들이 밀어 앉았기에, 창 틀과 남자쪽 의자 손잡이를 팔걸이로 이용했다. 그런 그녀를 위해 그는 창가 쪽으로 다리를 한데 모으고 그녀가 편히 앉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좁은 공간이었기에 누가 봐도 부부처럼 보였다.

 

힘들게 앉은 그녀는 그를 보면서 계속 욕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만나면 입을 확~~ …", "내가 사람이 좋아서 참지, 저걸 그냥…" 등등 욕을 막 해댔다. 참 이상한 광경이기에, 그들의 모습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아마도 사연이 이랬던 거 같다.

 

그는 앉아서 오고 있었고, 그녀가 탔을 때 빈 자리가 있어 앉으려고 했지만, 앞에 탄 사람이 먼저 앉았던 거 같다. 거기는 노약자석이라 본인이 앉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젊은이가 잽사게 앉아버렸고 그녀는 한끝 차이로 놓쳤던 거 같다. 그래서 맞은편 자리로 가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내가 타는 정류장에 사람이 엄청 많이 타는 바람에 순간적인 재치(?)로 본인만의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편하지 않아 보였지만, 암튼 그녀는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꾸만 맞은편(서 있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을 바라보면서 계속 욕을 했다. 한바탕 찰지게 욕을 하더니 어쩔 수 없이 마주봐야만 하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친화력은 참 대단했다. 혼자 하는 욕이 재미 없었는지, 이제는 그에게 자리 한탄을 하면서 함께 대화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도 내심 나쁘지 않았는지, 그녀를 바라보면서(안 바라볼 수 없는 상황) 허허 웃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으면 친화력이 엄청나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저씨는 옷을 보니, 등산 갔다 오셨나 봐요?"

"허허 그렇죠 뭐."

"난 결혼식 갔다 오는 길인데, 그런데 아저씨도 한 잔 하셨나 보다."

"허허 그렇죠 뭐."

"난 맥주 2잔 정도 마셨는데, 아저씨는 등산이니 막걸리, 아님 맥주, 아님 소주?"

"소주요"

"아 그렇구나. 내 그런거 같더라. 그런데 아저씨는 고향이 어디에요."

"강원도요."

"강원도드래요."

"허허."

"강원도드래요."

그녀는 진정한 작업의 달인이다. 지치지 않고 계속 대화를 이끌어 내고 단답형으로 말하는 그가 지루해 할까 봐, 어설픈 사투리까지 하면서 대화를 이끌고 있었다. 소심하고 낯 가리는 나에게 필요한 친화력을 그녀에게 배울까 하고 생각하던 중, 바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저씨 어디까지 가요?"

"000에서 내립니다."

"그럼 내가 2정거장 더 가는구나. 그런데 아저씨 마나님은 있으신가?"

"허허 (그는 말보다는 그냥 웃기만 했다.)"

"있어요? 없어요?"

그는 있지도 없지도 않다는 애매모호한 표정만을 지었고, 그녀는 그냥 있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럼 우리 내려서 한잔 더 할까요?"

헉~ 그녀가 먼저 애프터(?)를 신청했다. 그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면서 오케이를 했다.

 

"그럼 우리 어디 가서 마실까? 저기 시장에서 내려서 마실까?"

"거긴 별로 마실만한 곳이 없는데."

"내가 이쪽으로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거든요."

"나도 잘 알지 못해요"

그럼 여기, 저기, 아니 거기 등등 그녀는 계속 장소를 말했지만, 그는 계속 아니라고 했다. 그러다 그도 마음에 드는 장소가 나왔는지, 00에서 내리기로 합의를 봤다.

 

"강원도드래요"

기분이 좋은 그녀는 또 그에게 위트를 날려줬다. 그는 계속 허허허 웃기만 했다.

 

"아저씨는 자식이 있어요? 나는 시집 장가 다 보냈다우. 공부도 잘했고, 지금 의사로 있다우."

"허허."

자식 자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그녀와 그의 모습을 끝까지 보고 싶었으나, 그들이 내리고자 하는 정류장은 내가 내리는 곳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아마도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 술 마시는 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했겠지. 그 다음부터는 여러가지 상상이 가능하지만, 괜한 상상을 그만두기로 하자.

 

 

자리를 놓쳐서 속상한 그녀, 그녀의 말을 들어 준 그. 없던 공간을 만들어서 낑겨 앉은 그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배려해 준 그. 그렇게 둘은 마주보게 됐고, 그녀의 재치 있는 말재주에 그는 웃음으로 화답하면서 그들의 급 만남은 이렇게 성사되었다. 각각 술을 마셨고, 순간적으로 만원버스가 됐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참 쉽지 않은 작업을 성공한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그를 재미나게 해주는 그녀의 재치와 공간을 나눠 준 그의 배려. 그리고 정말 가까운 거리를 마주봐야만 했던 그들. 애프터가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프터를 그녀가 먼저 요청을 했으니, 용감한 그녀라고 해야 할거 같다. 그런데 그들을 쳐다보는 시선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놀라움과 당황한 그리고 거부감이 있던 나부터, 세번째 좌석에 앉아 있던 동년배처럼 보이는 여성분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만원버스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는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그녀의 "강원도드래요"는 왜 이리도 귀에 쏙쏙 박히던지, 애교가 애교가 엄청난 그녀였다.

 

버스 안에서 목격한 헌팅의 기술이지만, 솔직히 배우고 싶지는 않다. 아니 배운다고 해도 써먹지는 못할 거 같다. 처음에는 그들의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지만, 버스에서 내리고 난 후 밖에서 그들을 쳐다보니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버스는 그렇게 지나갔고, 난 요거 잘 기억해 뒀다가 블로그에 올려야지 하면서 집으로 왔다.

 

운명적인 만남은 엄청 대단할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스스로 그런 만남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많은 운명 같은 만남을 남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겠다. 나도 한잔 걸치고, 2차를 함께할 누군가를 버스에서 구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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