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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올레TV 캡쳐)

영화 도가니의 충격이 너무 큰 이후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멀리하고 싶었다. 너무 아프고 슬픈 일이지만, 어차피 다 지난 일이고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변호인과 또 하나의 시작을 보게 되면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만 잊는게 가장 무서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잊혀져서는 안되는 일들이 올해 너무나 많이 생겼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공주. 2004년이라면 성인이었던 시절인데 분명 그때는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을텐데, 10년 후 난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그저 남의 집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독립영화가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어 대단하네라고 생각하면서 또 본질보다는 포장에 관심을 뒀다.

 

더구나 올레티비에서 50%할인한다는 말에 냉큼 결제를 하고, 할인할때까지 잘 기다렸어라고 혼자 기특해하면서 시청하기를 터치했다. 아 진짜 나란 인간, 참 못됐다. 이 글을 쓰면서 나의 이런 못된 생각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정말 잊지 않겠다고,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싶다. 나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것뿐이지만, 그래도 꼭 기억하겠다고 다짐 또 다짐한다.

 

영화는 공주가 선생님과 함께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집,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 있고, 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녀가 왠지 안쓰럽고 불쌍해 보였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거 같은데, 아직은 모르겠다. 학교를 다니면서 수영을 배우기에 새로운 곳에서 노력하는 구나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주가 산부인과를 갔다. 그 곳에서 여선생님을 원했지만 남선생님이 오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치료를 할때 힘이 들어가는 그녀의 손을 보니, 왜라는 궁금증에서 설마 아니겠지 했다. 

 

  

그런데 그 설마는 바로 증명되었고, 그녀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래도 그녀는 새로운 출발을 위해 서서히 자신의 맘을 열고 친구도 만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웃지 않던 그녀가 점점 웃게 되고, 자신의 재능을 찾아준 친구에게 여전히 마음의 문은 굳게 닫았지만 조금씩 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그 끔찍했던 사건을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한다.

 

절친 친구와 친구의 남친 그리고 한공주, 공주는 아마도 친구의 남친을 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느날 공주 집에 절친 친구와 그 남친 그리고 남친을 괴롭히는 일진들이 찾아 왔다. 공주는 친구남친을 위해 일진에서 따끔하게 혼도 내고 구해주려고 하지만 여자 혼자서 몇십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건 버거운 일이다.

 

시점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공주의 아버지가 찾아왔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의 저녁식사, 그리고 아버지가 내민 종이 한장. 이 한장이 그녀의 미래를 송두리째 뻇어가게 된다. 아직 영화는 사건의 핵심을 공개하지 않았다. 차라리 안보여주면 더 좋았을텐데, 영화는 끔찍하게 그날의 일을 공개했다. 공주의 집에서 약에 취한 공주를 고릴라 탈을 쓴 일진과 친구의 남친이 성폭행을 하는 장면을 말이다. 돈에 딸을 팔아버린 아빠와 찾아온 딸을 구박하는 엄마, 가족도 그녀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세상도 그녀를 버렸다.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공주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만난 새친구, 그녀로 인해 공주는 조금씩 마음에 문을 열고 그녀의 집까지 가게 된다. 그 집에서 친구가 공주에게 물어본다. "너 키스해 봤어? 몇 명이랑 해봤어?" 공주는 이렇게 말한다. "43명,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고릴라였어"(정확한 대사가 아닐 수도 있음) 농담으로 생각한 친구는 그녀에게 볼 뽀뽀를 한다. 그리고 이젠 44명이다. 내가 오늘 천명으로 만들어 줄게. 아직 사건의 진실이 나오기 전이라, 공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왠 고릴라? 그러나 그 의문은 곧 풀리게 됐다. 고릴라가 아니라 고릴라 탈을 쓴 남자였던 것이다.

 

 

공주를 돈에 팔아버린 아빠로 인해 공주의 현재 위치가 노출되어 버렸다. 가수를 꿈꾸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 올 즈음 기회보다 먼저 불청객이 들이 닥친다. 그리고 새로운 학교는 공주의 과거를 알게 되고, 역시 누구 하나 그녀의 손을 잡아 주는 이가 없었다. 공주를 그렇게 좋아했던 친구조차 공주가 내민 손을 거부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느꼈던 사람에게 조차 버림 받게 되고 아무도 없는 낯선 그 곳에서 공주는 혼자가 됐다.

 

공주의 마지막 선택은, 말 안해도 다 알 거 같다. 영화이기에 마지막 그 날, 기획사로 부터 연락이 온다. 그러나 그녀는 갈 수가 없다. 잘못한게 없는데도, 그녀는 도망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끝은 없기에 공주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한다. 절친 친구의 길을 똑같이 걷는 것이다. 영화 내내, 공주가 왜 수영을 하고 싶어할까 생각했었다. 그 이유는 마지막에서야 확인할 수 있지만, 아쉽게 아직 수영이 서툰 공주였다.

 

 

공주를 포근히 안아주는 이가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공주의 손을 잡아주는 이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엔딩크레딧을 보면서 느꼈던 내 심정이다. 영화를 본 후 소재가 됐던 그 사건을 다시 봤다. 그리고 알게 됐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간혹했음을 말이다. 가족도, 친구도, 언론도, 학교도 누구 하나 그녀 편이 아니었다. 세상은 모두다 그녀만을 손가락질 해댔고, 재수없게 죄를 짓게 됐다고 되래 그녀에게 화살을 돌렸던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가해자인 그들은 18세에서 28세가 되었을 것이다. 대학도 나오고, 군대고 가고,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저 작은 불장난이라고 여기고 있을 그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뉘우침은 있을까? 아마도 없을거 같다. 2014년에도 뉘우침이 없는 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10년 전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10년이 지나도 세상은 변한게 없고, 여전히 한공주는 세상 어딘가에 있을거 같다. 가진 자의 논리 앞에서 힘없는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어 버리고, 사건은 그저 은폐되고 축소되어 버리니깐 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느껴졌지만, 이게 다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없고, 그저 울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진짜 잊지 말자고, 잊어버리지 말자고 말이다. 그리고 정의가 살아 있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반드시, 제발 왔으면 좋겠다. 올해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은 변호인의 송강호, 여우주연상은 한공주의 천우희, 그나마 영화제에서 정의는 살아 있구나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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