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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맛 조아~~

언제부터 매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까? 정확한 연도, 월, 일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짜장면보다는 짬뽕을 더 찾게 되었고, 바지락 칼국수보다는 칼칼한 김치 칼국수를 찾게 되었다.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조카는 아직도 매운맛을 싫어 아니 강하게 거부한다. 음식에 쬐그만 고추가루라도 보이면 절대 먹지 않는다. 좋아하는 부추호박전에 모르고 청양고추를 넣었다가, 입에서 불이 난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적도 있었다. 조카가 집에 오는 날이면, 모든 음식에 매운맛을 내는 재료들은 싹 사라진다. 매운맛이 없는 심심한 동그랑땡에 부추전 그리고 얼큰한 육개장도 맑은 설렁탕이 되어 버린다.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가족이 선호하는 매운맛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가장 막내인 조카가 음식에서만은 무조건 1순위다. 조카가 가면 그때서야 남은 부추전에 청양고추를 넣고, 설렁탕은 고추가루를 팍팍 넣어 육개장으로 만든다. 다 큰 어른이 음식 가지고 조카와 싸운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매운 맛 세계로 빨리 인도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뻔했다. 매운 맛을 모르니, 입이 아프다고 펑펑 우는 조카 앞에서 모른 척 했지만, 내심 미안했었다. '그래, 언제 가는 너도 나처럼 매운맛을 엄청 좋아할 때가 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마'하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그때가 언제일까? 내 기억을 유추해보면, 저학년 때는 아니고, 고학년 때고 아니고, 중학교 때도 여전히 짬뽕보다는 짜장면을 먹었던 거 같다. 학교 앞 떡볶이 집도 국민, 중학교 때에는 매운맛보다는 달달한 떡볶이였던 거 같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때인 듯싶다. 야자 몰래 나와 먹었던 짬뽕이 기억나고, 물을 벌컥 벌컥 마시면서 먹었던 매운 떡볶이가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럼 고등학생이구나. 앞으로 7~8년 정도 기다려야 조카와 함께 매운 닭발을 먹을 수 있겠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매운맛을 안다는 건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의미인 거 같다. 아기였을 때부터 좋아했던 단맛의 유혹을 과감히 버리고 선택한 것이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엄청난 세계를 만나게 됨을 의미하니깐 말이다.

 

달고, 짜고, 쓰고, 시고 여기에 매운맛이 추가가 됐으니, 맛의 영역은 더 다양해졌고, 먹을 음식은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 매운맛을 알게 됨과 동시에 모든 맛은 다 매운맛으로 통일됐다. 달고 짠맛에 매운맛이 추가가 되면 그냥 매워진다. 심심하거나 밍밍하거나 느끼할 때는 자동적으로 매운맛을 찾게 된다.

 

쌈에는 항상 매운 마늘과 청양고추를 넣어야 하며, 맑은 국에는 칼칼한 맛을 주기 위해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야만 한다. 매운맛을 알게 되어 좋은데, 모든 음식이 매워짐은 살짝 아쉽다.

 

인생은 원래 쓴맛이고 매운맛이라는 말하던 어른들을 따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도 어른이 됐으니, 인생의 참맛을 알아야 하기에 매운맛을 먹게 됐을까? 그러나 가장 큰 이유가 남아 있다. 바로 캡사이신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말. 바로 그 말 때문에 더더욱 매운맛에 빠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면 살도 자동적으로 빠지고, 얼굴도 예뻐질 거야. 걱정하지 말고 공부나 해." 어른들이 내게 말한 가장 큰 거짓말이다. 이 말만 믿고 그눔의 공부 스트레스를 폭식으로 해결했던 가장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인해 매운맛 중독자가 됐다.

 

여기에 하나 더, 캡사이신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 학교 다닐 때는 공부만 하면 되었다. 공부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나이가 되자, 공부만 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때는 물 없이 짬뽕을 먹지 못했는데, 이제는 물은커녕 청양고추까지 추가로 넣어 더 맵게 먹는다. 매운맛 고통으로 잠시나마 잊고 싶기 때문이다. 다 먹고 난 후 다음날 화장실에서 나 혼자만의 싸움을 해야만 하고, 또 다시 스트레스가 쌓이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 매운맛을 찾게 된다.

 

마지막으로 매운맛 = 어른 공식이 성립하게 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해장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술의 양은 줄어들고, 해장의 필요성을 더더욱 커져만 간다. 20대때는 해장은 무슨, 술은 술로 다스려도 거뜬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칼칼한 짬뽕 국물 없이는 너무 힘이 든다.

 

 

죽음의 돈가스, 엄청 매운 신길동 짬뽕은 먹지 못하지만, 그래도 짜장면에 고추가루를 넣고, 간장 비빔밥대신 고추장 비빔밥을, 삼겹살에 마늘과 청양고추가 없으면 서운해지는 그런 나이가 됐다.

 

매운맛을 싫어하는 조카를 보면, 어른만이 가진 특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만큼 인생의 매운맛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엄마 화장품으로 메이크업도 하고, 이모 하이힐도 몰래 신고 다녔지만, 조카에게는 천천히 알려줘야겠다. 굳이 매운맛을 빨리 알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만큼 삶의 무게가 무겁고 맵다는 의미이니깐 말이다.

 

이따가 점심으로 아직 못 먹어본 불닭 볶음면에 도전해야겠다. 왜냐하면 난 어른이니깐. 철은 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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