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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음검색)

초등, 정확히 말하면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오면서 좋았던 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과 교과목이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공부를 잘해서 좋았던 건, 전혀 아니다. 뭔가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한 선생님이 아니라 과목별 선생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를 기대감에 빠졌던 거 같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영어는 미국인들처럼 쏼라쏼라 멋드러지게 잘 할거라는 내 예상은 아임엠 어 보이, 파인 탱큐 이후로 별반 나이지지 않았다. 말하기가 아니라 왜 문법부터 배워야 했는지, 우리나라 말을 배울 때에도 문법부터 배우지 않았는데, 왜 영어는 그래야만 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지금도 외국인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이유는 중학교 때부터인 듯하다.

 

영어는 그렇다 치고, 개인적으로 역사와 지리과목을 좋아했었다. 어릴 때부터 역사관련 책을 많이 봤기에, 교과서도 그런 책이라고 생각하고 받자마자 소설책 읽듯 그렇게 읽었다. 그리고 지리과목은 참 신기했다. 완전 컬러풀한 사회과부도와 함께 잡지를 보듯 신나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중학교 지리과목이 따로 있었나? 사회과목에 포함되어 있었나? 아~ 이건 기억이 안 난다.

 

 

그렇게 좋아하던 지리시간이 끔찍한 미술시간이 될 줄은 정말 정말 몰랐었다. 중학교 2학년 첫 지리수업 날, 기숙사 사감선생 같은 선생이 들어왔다. 난 잡지책을 보듯 그렇게 교과서를 탐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주변이 웅성웅성 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부터는 먹지(먹종이 - 한쪽 또는 양쪽 면에 검정 탄산을 칠한 얇은 종이를 말함)를 꼭 지참하도록 하세요."

 

  

(출처 - 옥션)

검은색, 아니 아주 까만 색 종이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왜 갖고 오라고 했을까? 까라면 까야 하는 시대였으니, 준비를 했다. 드디어 사감선생 시간이 됐고 그녀가 들어왔다. 그리고 즐거웠던 지리시간은 엄청난 디테일을 요하는 미술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분의 수업 방식은 참 기이했다. 우선 교과서에 나온 지도에 대한 설명을 한다. 솔직히 설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거 같았다. 아무튼 교과서에 지도가 나오면, 먹지를 꺼내라고 말한다. 그리고 먹지를 대고 지도를 그리라고 한다. 지리 시간이니 지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하겠지만, 굳이 지도까지 그려야 했을까?

 

수업 시간에 다 못 그린 지도는 집에서 그려와야 한다. 다음 수업 시간에 숙제 검사를 하고, 안 해온 사람이 있으면 추가 지도까지 그리도록 시켰다. 더불어 먹지로 그리지 않고, 대충 그려온 사람도 역시 숙제 양은 배로 늘어났다.

 

엉성하게 그려오면 다시 그려야 했기에, 숙제를 할 때면 손에, 교과서에, 때론 얼굴까지 검게 칠을 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전체 지도는 물론 각 지역 지도에 시도 단위 지도까지 아마도 교과서에 나온 지도는 다 그렸던 거 같다. 사회과부도까지 그리도록 했으니, 이건 지리수업이 아니라 미술수업이었다.

 

굳이 지도까지 그려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전혀 안 된다. 교과서 중에서 가장 더럽고 너덜너덜했던 교과서가 바로 지리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깨끗이 쓰는 나에게 먹지로 더럽혀진 교과서는 꼴 보기 싫은 교과서가 되고야 말았다.

 

참, 먹지를 이용한 지도 그리는 방법은 이렇다. 우선 그리고자 하는 지도 아래 먹지를 댄다. 그리고 그 아래 공책을 댄다. 즉 교과서 아래 먹지 아래 공책인 것이다. 기본 준비가 끝났으면, 볼펜이나 샤프를 이용해 지도를 따라 그려주면 된다. 여기에 색연필을 이용해 지역별로 색을 칠해주면, 예쁜 받는 학생이 되는 지름길이었다.

 

그렇게 먹지와 씨름을 하면서 일년을 보냈다. 다행히 3학년때는 그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다. 2년 연속 만났다면, 제물포(제땜에 물리 포기)가 아니라 제지포(제땜에 지리 포기)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중학교를 보내고 고등학생이 됐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지리시간, 젊디 젊은 남자 선생이 들어오셨다. 야호~ 신이 있다면, 내게 선물을 주는 구나 했다. 암흑기가 끝나고 중흥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나? 일년이 지나고 다시 암흑 아니 빙하기가 된다는 사실은 그때는 정말 정말 몰랐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나는 선생님을 따라 성적 차이가 엄청 났었다. 당연히 고1지리 성적은 최고를 찍었다. 좋아하던 과목에 멋진 선생님까지 완전 신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먹지에 대한 아픈 기억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이번에도 역시 멋진 남자선생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성도 보였다. 왜냐하면 옆 반 담임이 바로 그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운명의 장난이 또 있을까?

 

고2 지리 첫 수업시간, 옆 반 담임인데 우리 반에도 들어오시겠지 하면서, 엄청난 기대감에 두근두근 하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고 잘생긴 그 선생이 들어와야 하는데… 이건 꿈일 거야, 분명 꿈이야, 절대 현실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 냉혹했다. 문이 열리고 들어 온 분은 바로 중2때 만난 먹지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중학생도 아니고, 고등학생이나 됐는데, 설마 먹지를 준비하라고 하지 않겠지. 이제는 고등학교 선생이니, 그런 저급(?)한 수업을 하지 않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 입에서 나온 말, "다음 시간부터 먹지를 준비하세요."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는데도 수업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다른 중학교에서 온 친구들은 뭥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덩 씹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다시 암흑 아니 빙하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선생이 어떻게 고등학교 선생이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 당시 참교육을 원하는 선생님들의 사퇴로 인해 공석이 생겨 가능했던 거 같다.

 

난 어떻게 해서든 먹지 선생 눈에 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 혹시, 00중학교 나왔니?" 이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먹지 수업이 진행되자,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들은 먹지가 뭐고,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 역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나도 모르게 쓱쓱~ 엄청난 실력을 뽐내게 됐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특별과외(?)까지 해주게 되었고, 결국 먹지선생은 날 알아봤다.

 

같은 중학교 출신으로 잘생긴 지리 선생 반 친구에게 놀라운 먹지선생 얘기를 하자, '너 지지리 복도 없구나, 불쌍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 친구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암흑기였던 고2 지리수업 나는 우등생이 됐고, 먹지선생에게 엄청난 예쁨을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수업 때문인지, 지도에서 지역을 잘 찾는 능력(?)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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