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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은 겸재정선 미술관 - 양천향교 - 궁산근린공원이었다. 그런데 미술관을 나오자 두번째 코스는 안 보이고, 그 다음 코스였던 궁산근린공원이 바로 나와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공원부터 먼저 보기로 했는데, 글쎄 공원 초입에서 양천향교로 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대충 지도만 보고 짰던 코스가 맞춤복처럼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미술 공부를 했으니, 이제는 역사 공부를 할 차례, 체육시간은 그 다음이다(소니 nex-3n으로 촬영)

 

 

무성한 나무와 봄꽃이 가득했던 시크릿 가든같은 곳, 여기는 궁산근린공원에서 양천항교로 가는 길이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왠지 모를 이상한 나라로 떨어질 것 같고,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도깨비를 만날 수 있을거 같고, 허리에 찬 시계를 보면서 바쁘다고 뛰어가는 토끼를 만날 거 같은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현실은... 

 

 

이름 모를 꽃을 만났다. 벚꽃, 개나리를 보기 위해 자꾸만 위, 위만 쳐다보다가, 계단에 넘어지지 않고 내려가기 위해 아래를 쳐다봤더니, 글쎄 요렇게 아기 천사같은 꽃을 만나게 되었다.

 

 

작은 천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있었다.

 

 

야생화인거 같은데, 이름은 모르겠다. 쭈그리고 앉는거 참 싫어하는데, 요녀석들을 가까이에서 더 많이 보기 위해 한참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만난, 벚꽃이라 생각했는데.

 

 

벚꽃은 아닌거 같다. 멀리서 봤을때 딱 그러했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비슷하지만 아니었다.

 

 

계단을 따라 봄꽃과 함께 하면서 내려오니, 어느새 양천향교에 도착을 했다.

 

향교(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의 안찰사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地方官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 목 군 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항교는 중앙의 사학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자는 생원, 진사의 칭호를 받으면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고 서원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여졌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할 따름이었다.(출처 - 위키백과)



양천향고는 본래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에 위치했던 향교로 경기도 지방 향교로 분류되었으나, 1963년에 이 지역이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로 행정편입되면서 서울의 유일한 지방 향교가 되었다고 한다. 지하철 9호선 역명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양천향교가 우리의 교욱기관이라니 새삼 또 배웠다.

 

양쳔향교 앞에 있는 저 문은 홍살문이다. 홍살문(紅箭門)이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에 세우도록 한 붉은 문이다. 홍살문의 원음은 붉은 화살로 된 문으로 홍전문(紅箭門)이다. 홍살문이 설치된 곳에서 오리(2km)아내에는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다. 

 

 

그럼 이게 하마비???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하마비는 또 왕이나 장군·고관·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놓기도 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인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1413년(태종 13) 2월에 처음으로 예조에서 건의하여 왕의 허가를 받아 나무로 만든 표목(標木)을 세웠다. 표목 전면에는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大小官吏過此者皆下馬).”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다르게 거리를 표시하고 있는데,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거리에서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표목은 후일 석비로 만들기도 하여 오늘날까지 그 실물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삼문이다. 외동문, 외신문, 외서문으로 구성,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간다. 석전행사 시에는 외신문을 개방한다고 양천향교에서 받은 리플렛에 이렇게 나와 있다. 예전에는 들어가고 나가는 문이 다를지 몰라도, 지금은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표시한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다 올라왔다. 이젠 안으로 들어가보자.

 

 

양천향교의 모습이다. 맞은편에는 명륜당이 있고,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소로 사용했던 곳, 여기는 동재다.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소로 사용했던 곳, 여기는 서재다.

 

 

명륜당(明倫堂)이다. 이 곳은 교궁, 학당, 교실로서 학생 30~50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교수 1인, 직원 1인이 교육을 담당하고 과거시험은 성균관에서 직접 관장하였다. 각 향교에서 1, 2명씩 30여명을 모아 한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으며, 월급없는 벼슬 진사, 생원의 직급을 줬다.

 

문이 잠겨 있어서 내부는 볼 수 없었다. 공개가 안되는 걸로 생각했는데, 리플렛을 보니 석전의례, 고전 강독같은 상설 교육 강좌를 여기에서 한다고 나와 있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유적지가 아니라 이름에 걸맞게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명륜당 앞에서 바라본 양천향교의 모습. 여기서 뛰어 놀았을 댕기머리 도령들이 막 보이는거 같다.

 

 

명륜당 뒷편에도 또다른 곳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봤다. 어디서 많이 본 담벼락이라 생각했는데, 좀 전에 궁산근린공원에서 양천향교로 내려오면서 봤던 바로 그거였다.

 

 

내삼문이다. 문묘 의례시에 출입하는 문이다. 들어갈때는 동쪽 문으로 나올때는 서쪽문으로 나오며 중앙의 문은 신문이라 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고 한다. 설마 지금도 중앙문 출입을 금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민들레다.

 

 

참 예쁜 노란 민들레다.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지만, 순간 말벌이 등장하는 바람에 한동안 얼음이 되어 버렸다. 말벌이 사라졌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내삼문의 중문도 동문도 서문도 다 잠겨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어렵게 담은 내부 모습이다. 중앙에는 대성전이 왼쪽에 보이는 저 곳은 전사청이라고 한다. 대성전은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부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전사청은 제수를 준비하는 곳이다.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인물은 유교를 창시하고 발전시킨 성인 및 현인들로 인류의 문화 발전을 위하여 도의를 선양한 위대한 인물들이다.

역사적으로 공자 이외의 인물도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공자 외에 공자의 제자인 안자와 증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 전국시대의 인물인 맹자를 5성이라 하여 성인으로 모시고 위패를 안치하고 있으며, 그 옆의 동, 서, 무에는 송나라의 학자 4현(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과 신라의 학자 2현(설총, 최치원), 고려의 학자 2현(안향, 정몽주), 조선의 학자 14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을 합쳐 도합 5성위와 송대의 4현, 우리나라의 학자 18현 등 27위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이상한 나라도, 요정같은 도깨비도, 시계를 보는 토끼는 만나지 못했지만, 서울의 유일한 지방 향교인 양천향교를 만났다. 말벌의 위험에서 가까스로 살아났기에, 다시 또 걸었다. 다음 코스는 궁산근린공원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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