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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을 그리며 |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이렇게 시작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역사를 단편적 혹은 왜곡해서도 안된다. 105주년 삼일절을 그리며, 용산에 있는 이봉창의사 역사올림관으로 향했다.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은 서울시 용산구 백범로 281-9에 있어요~

2015년에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가 특집을 준비했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경교장과 같은 상징적인 곳에서, 박물관이나 기념관도 일일이 찾아다녔다. 서울에 있는 곳은 거의 다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2020년 용산에 새로 개관한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은 아직이다. 진작에 다녀왔어야 했는데, 늦게 찾아 뵈서 죄송합니다~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은 전통 한옥 건물로, 일대기와 의거 기록 등 그의 숭고한 독립투쟁과 애국정신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왜 여기일까? 효창공원에 삼의사묘역과 이봉창의사 동상이 있어 그런가,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뚜렷한 이유가 있다는 거,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알 수 있다.

 

이봉창의사 흉상 오른쪽에 작가 소개와 함께 이런 글이 있다.  

"김호연 회장(빙그레 회장)은 백범김구 선생의 손녀사위로 김구재단을 설립하여 보훈 관련 공익사업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후손이 없어 선양사업이 활성화되지 못한 이봉창의사 기념사업회를 재건, 지원하고 있으며,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 개관을 기념하여 이봉창의사 흉상을 기증하였다." (정부가 알아서 미리 챙겼다면, 더 일찍 울림관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흉상 옆에 있는 글은 선서문으로,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 십삼 년 십이월 십삼일 선서인 한인애국단 앞 이봉창" 흉상 아래 발그림에 서 있으면 선서문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 

 

왜 용산에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이 있을까? 이봉창의사는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방의 원정 2정목(현 원효로 2가)에서 아버지 이진구와 어머니 손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11살이 되던 해, 경성부 금정(현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로 이사했다. 참,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일제 식민 통치의 상징물이었던 남산 조선신궁이 건립되었던 곳에 위치해 있다. 

 

전시관 내부 모습
이봉창의사 관련 서적

12세까지는 가정이 부유했지만, 13세부터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져 15세에 졸업 후 바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과자점, 무라타 약국을 거쳐 19세에 지인의 추천을 받아 용산철도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승급과 봉급 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 월등히 높은 대우를 받고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상신서는 의거 이후 이봉창의사가 도쿄 도요타마 형무소에서 작성한 수기로 용산역 근무시절, 오사카에 있을 때의 일, 부두노동 할 때의 일 등 6개의 소제목을 붙여 자술서 형식으로 자신을 행적을 설명한 진술서이다.

 

1925년 민족 차별이 없는 삶을 기대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시다 마사조라는 일본 이름을 쓰며, 일본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직과 급여에서 차별을 여러 번 받아 반일 감정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1928년 그는 일왕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일본인 친구와 함께 교토에 갔다. 친구와 달리 이봉창의사는 경찰의 몸수색 과정에서 한글과 한문으로 쓰인 편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검속 되어 즉위식도 못 보고 9일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다. 이로 인해 반일, 항일 감정은 더욱 깊어졌다.

 

이봉창의사는 기노시다라는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이봉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그의 기대와 달리, 임시정부 사람들은 일본 옷을 입고, 일본 말을 유창하게 하는 그를 염탐꾼인 줄 알고 멀리했다.

하지만, 김구 선생은 달랐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청년 이봉창이 마음에 들었다. 1931년 5월 그는 김구 선생에게 "폭탄을 구해주면 일본에 가서 일왕을 살해하겠다"라고 결심을 밝혔고, 김구 선생은 "결심이 확고하다면 폭탄을 구해주겠다"라고 화답하며 두 지사가 의기투합했다.

 

독립의연금 영수증 / 의거자금 요청 친필편지
김구선생이 이봉창의사에게 보낸 전보

이봉창의사는 1931년 12월 13일 김구 선생이 주관하는 한인애국단에 제1호 단원이 되었다. 한인애국단은 일제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김구 선생이 만든 비밀 단체로, 자기 목숨을 내건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VR체험존

1931년 12월 22일 이봉창의사는 몸에 폭탄을 숨긴 채 일본에 도착했다. 도쿄에 온 그는 김구선생에서 "상품은 1월 8일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라"라는 전보로 거서 일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그날, 미리 봐둔 장소에 갔지만, 일왕을 보러 온 사람으로 인해 붐비고, 현병과 경찰들의 감시가 너무 심해 다음 장소로 이동을 했다. 다행히 몰려든 사람을 없었지만, 일왕이 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꾸는 바람에 마지막 장소로 서둘러 갔다. 

 

그런데 헌병과 경찰들의 검문으로 인해 몸에 지닌 수류탄이 발각될 수 있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뻔했지만, 미리 구해놓은 헌병대장 명함과 깔끔한 옷차림에 예의 바른 말투로 인해 일본신사인 줄 알고 몸수색을 당하지 않았다.

잠시 뒤 일왕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다. 이봉창의사도 머리를 숙였고, 일왕이 탄 마차는 점점 다가왔다. 더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말이 다치고 바퀴가 부서졌는데, 예상과 달리 수류탄의 화력이 매우 약했다.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왕이 탄 첫 번째 마차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고 했지만, 다른 사내가 범인으로 지목받아 헌병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은 놔주시오. 내가 일본 왕에게 수류탄을 던졌소."

이내 헌병과 경찰들이 그에게 달려들었고, 이봉창의사는 그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크게 외쳤다.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이봉창의사 사형선고 기사

그는 수차례 심문을 받고 1932년 9월 30일 일본의 최고 재판소인 대심원에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심만으로 형이 확정됐다.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이봉창의사는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 순국했다. 유해는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매장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난 일본 왕 개인을 미워하지 않소. 그러나 내 나라를 짓밟고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일본 왕을 증오하오. 그는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내 나라를 되찾는 길이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확신하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김구선생은 일본에 있는 박열에게 이봉창의사, 윤봉길의사, 백정기의사의 유해 봉환을 부탁했다. 1946년 4월 20일 귀국길에 오른 세 의사의 유해는 5월 15일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삼의사 유해 인장식
삼의사 추도식에 참석한 백범 김구 선생

7월 6일 국민장이 거행되었으며 김구 선생의 의견에 따라 유해는 효창원(현 효창공원)에 안치되었다. 이로써 이봉창 의사는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만주사변이 일어나 항일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중국은 "불행히도 폭탄이 천황에게 명중하지 않았다"며 대서특필했다. 만보산사건에 대한 한국과 중국 간의 감정 대립은 이봉창의사 의거를 통해 정리되었다.

 

이봉창의사 의거는 한국인의 정신적, 정서적 입장에서 일왕을 죽인 것과 다름이 없으며, 세계에 한국인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당시 부진한 활동으로 인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있던 임시정부는 활력을 되찾았고 윤봉길의 거사 성공 등을 통해 항일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봉창의사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성공했다면 원자폭탄이 아니라 우리 힘으로 광복의 기쁨을 만끽했을 거다.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는 임시를 떼 버리고 정식 정부로 인정받아 남북이 함께하는 대한민국이 됐을 거라 믿고 싶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시작점을 찾기보다는 더 잘못되지 않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 

■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
관람시간: 10:00~17:00 (12:00~13:00 점심시간)
휴관일: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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