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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없이 오는 그분만 없다면 난 엄청 잔잔한 사람이야~ (청송주산지, 캐논 400D)

 

돈이 많았으면 좋겠고, 명예도 있으면 더 좋겠고, 여기에 권력까지 있다면 그야 말로 최고다. 더불어 사랑까지 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한 순간 물거품으로 변하는 순간이 온다. 이 세상의 모든 신을 찾게 되며, 갖고 있는 모든 걸 다 줄 테니 제발 제발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순간이 온다.

 

나의 출근길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다. 가까운 직장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참 먼 곳으로만 다닌다. 2시간 정도 걸렸던 적도 있었으니 내가 생각해도 출퇴근으로 허비한 시간이 참 많았다. 장시간 버스와 지하철을 타다 보니, 뜻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공복에 찬물 한 컵을 쭉 들이마시고 그분과 집에서 만난 후 출근을 해야 올바른 코스인데, 늦잠을 자거나 그분의 연락이 없어 그냥 나올 때가 있다. 더불어 전날 회식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면, 우선 지각은 하면 안되기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온다.

 

그리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아주 잘 가면 되는데, 절대 가만히 있을 그분이 아니다. 얄밉게도 그분은 꼭 연락을 한다. 오늘만은 그냥 넘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말이다. 첨에는 아주 미세한 진동으로 연락을 준다. 아직은 괜찮다. 아침에 문안인사 안 했다고 샘이 나서 이런다고 생각하면 된다. 첫 연락 후 별다른 연락이 없이 회사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따로 없겠지만, 그분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다.

 

미세한 첫 연락 후 시간차 공격으로 묵직한 두 번째 연락이 온다. 그분께서 노하신 순간이다. 더불어 세상구경을 지금 당장 하고 싶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압박의 여파로 얼굴은 붉어가고, 식은땀은 정성껏 한 메이크업을 망치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세 번째 연락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우선 내려서 5성급 호텔을 찾아 세상 구경을 해드려야 한다. 세 번째 연락은 내가 어떠한 환경에 있어도 지금 당장 만나러 나오겠다는 신호이기에, 두 번째 연락에서 행동개시를 해야 한다.

 

지하철을 탔다면, 앱으로 각 역의 5성급 호텔의 위치를 파악해야 한다. 바로 다음 역, 내부에 5성급 호텔이 있다면 힘을 줄 필요도 없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호텔을 찾아 가면 된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게 참 얄궂다. 내부에 있다고 해도 500미터를 걸어가야 한다면, 그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부에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한다. 만약 외부에 5성급 호텔이 있다면, 돈을 다시 내거나 역무원에서 사정 설명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추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마트폰이 있어, 사전에 5성급 호텔 정보를 알 수도 있고, 거리까지 유추할 수 있으니 세상 편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하철이 아닌 버스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24시간 커피전문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분의 연락은 꼭 그런 곳을 피해서 오니깐 말이다. 5성급 호텔이 있을 거 같은 건물을 찾아 힘겹게 올라가면, 역시나 잠겨 있다. 다시 힘들게 내려와 또 다른 호텔을 찾지만 그분의 압박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진 상태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 앞에 은행이 하나 보인다. 다행이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제발 저 앞까지, 은행까지 별 일 없이 가게 해달라고 그분에게 애걸을 한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신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기도 덕인지 은행까지 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고객인 듯 은행으로 들어가 호텔을 찾기만 하면 된다. 은행과 연결된 건물 계단에 호텔이 있다면, 고객 코스프레를 할 필요 없이 바로 가면 된다.

 

그러나 그러나 금고 수준의 작은 은행일 경우, 직원들만 이용하는 3성급 호텔로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그곳은 바로 들어 갈 수가 없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호텔은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말을 하는 검색대에게 "저기 저.. 잠깐만 들어갔다 나오면 안될까요?"라고 대답을 한 후에 이용을 해야 한다.

 

5성급 호텔이 아니기에, 서비스가 부실하다. 기본적으로 다 주는 타월이나 가운도 없고, 청소상태도 부실해 보인다. 그렇다고 불평 불만을 해서는 안 된다. 유비무환이라고 스스로 타월과 가운을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부실해 보이는 호텔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은 후 그분의 등장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야 한다. 간혹 엄청난 사운드와 함께 등장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 내 탓이오 라는 맘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모든 과정이 다 끝났다. 이젠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너무 오래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분의 등장 사운드가 너무 컸고, 호텔과 검색대 간격이 너무 좁았다. 급한 맘에 들어 올 때는 작은 시야로 인해 안 보였던 호텔 이용객들이 막상 나가려고 하니 웅성웅성 그들의 목소리가 다 들려온다.

 

 

말하는 검색대만 보였는데, 이제는 이용객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하게 나가야 하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호텔을 무단침입 했다고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 따가운 시선으로 날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엄청나게 쳐다 볼 텐데, 이 시선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더 이상 호텔에 있을 수는 없고, 암튼 나가서 결판을 내자라는 심정으로 나간다.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누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밖으로 뛰어 나간다. 성공이다. 아무도 날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안 봤을 뿐인지, 그들은 내가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을 묵묵히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번 왔던 호텔은 꼭 기억해 둬야 한다. 혹시 또 가면 안 되기에 말이다. 한번 더 가게 되면 그분은 그분이지만, 참을 수 없는 창피함에 그분이 나오는 출입문을 꿰매버리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출근길, 지하철 노선도는 못 외워도 내가 들렸던 5성급 호텔만을 기억해 둔다. 버스는 각 정류장 별 가까운 은행 및 커피전문점을 기억해 둔다. 회사가 바뀌면, 또 다른 호텔을 기억하기 위해 초반 엄청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분은 내 맘대로 내가 원할 때 오는 분이 절대 아니기에 늘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며, 간혹 준비가 소홀해졌을 때 오시게 되면 그때는 돈, 명예, 권력, 사랑, 이 따위가 다 부질없는 한낱 먼지가 되어 버린다.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가기 위해 30분이나 일찍 일어났던 내가, 지각을 하던 일이 있더라도 아침밥은 꼭 챙겨 먹었던 내가, 몇 번 그분의 압박 후 아침을 끊었다. 그리고 배고픔을 간직하고 출근을 한다. 차라리 배고픔이 낫지, 출근길에 그분을 제발 보고 싶지 않으니깐 말이다.

 

만약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5성급 호텔을 찾지 못했다면, 그분의 신호를 무시했더라면, 그랬더라면, 나에게 세상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진짜 생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긴박했던 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분이 원하는 호텔을 찾았고, 잘 보내드렸으니 괜찮다라고 해야겠지.

 

이래서 '5성급 호텔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모든 걸 다 포기할 테니 제발 호텔만 나타나 주길 바랬다가, 내가 뭘 포기했는데 지금 농담해 하는 맘으로 호텔을 나가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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