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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성북선잠박물관 (feat. 선잠단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백성을,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간접체험만으로는 백성의 삶을 알 수 없기에, 임금은 농사를 짓고 왕비는 양잠을 했다. 서울시 성북동에는 선잠단의 터가 남아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성북선잠박물관이 있다.

  

서울시 성북동에 있는 성북선잠박물관!

성북동에는 조선시대 선잠단의 터가 남아 있다. 선잠단은 양잠의 신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며 한 해의 풍요와 안정을 기원했던 신성한 공간이다. 여기서 양잠은 고치로부터 명주실을 뽑아내기 위해 누에를 치는 것이며, 선잠은 양잠하는 법을 시작한 신을 뜻한다. 즉, 인간에게 양잠을 처음 가르친 서릉씨를 선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성북선잠박물관은 선잠단지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기리기 위해 노인정과 청소년공부방으로 사용되던 공간을 도시재생했다. 건물 외관은 알루미늄 재질의 파사드로 조성했는데, 이는 비단의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 관람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이며, 입장료는 성인 1,000원이다. 

 

1층에 있는 제1전시실은 터를 찾다라는 주제로 선릉씨, 선잠제, 선잠단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 있는 공간이다. 먹고 입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농업과 잠업(누에치기 사업)은 고대 사회 발전의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잠을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선잠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 꾸준히 시행되었으며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따는 친잠 의식도 이루어졌다. 농업과 잠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은 선잠단에서 선농제를 지냈다면, 왕비는 선잠단에서 잠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만 했다. 그러나 왕비는 선잠단에 갈 수 없어 신하들이 대신 제사를 치렀다.

 

길쌈 단원풍속도첩 김홍도
선잠단이 표시되어 있는 경도 해동지도 18세기 중반 / 도성도 광여도 19세기 전반

일제가 선잠단을 그냥 나뒀을까? 아니다. 1908년 조선의 국가제사를 대거 축소하면서, 선잠단의 신위는 선농단과 함께 사직단으로 이전되었고 선잠제도 중단됐다. 이후 선잠단지는 사유지로 매각되어 주택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선잠단지 복원을 위해 정밀발굴조사한 선잠단의 오른쪽 전체 모습

2016년 이루어진 선잠단지 정밀발굴조사 결과 동쪽의 중앙과 아래 구역에서 남북방향으로 평평하게 다듬은 돌이 발견되었고, 기와편 일부도 출토됐다. 더불어 제단의 대지, 유, 문이 있던 자리가 확인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2020년 선잠단이 재현됐다.

 

2층에 있는 2전시실은 예를 다하다라는 주제로 선잠제가 바람과 예를 담아낸 국가의례였음을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선잠제는 정종 2년부터 시행됐으며, 태종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제단의 설립과 제도가 모색되었다. 

 

선잠제의 주관자는 왕비가 맞지만, 신하들이 대신해 왕실을 뜻을 받들고 선잠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제관들은 규범과 법칙에 맞추어 희생과 폐백을 올렸다.

 

악공과 일무는 절차별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선잠제는 의례 속에 음악, 노래, 무용 그리고 음식이 어우러진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위 모형은 선잠제에서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례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정1품 초헌관이 자리로 나오면 등가에서 수안지악을 연주하고 문무가 춤을 춘다. 초헌관이 술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으면 대축이 축문을 읽는다. 축문을 다 읽고 나면 초헌관이 자리로 돌아온다. 이후 문무가 물러가고 무무가 나와 춤을 추며 헌가에서 서안지악을 연주한다.

 

선잠제는 늦봄 음력 3월의 상서로운 뱀날에 지내는데, 음력 3월은 뽕잎이 나기 시작하므로 잠월이라고도 불렀다. 선잠제를 주관하는 관리들은 5일전부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제사를 준비했다. 절차별로 음악과 무용도 준비하고 규범과 법칙에 맞춰 희생, 폐백, 음식, 제기 등을 설치했다. 

 

악학궤범은 세종대 이후 정비된 조선의 악기와 음악에 관련된 제도를 담은 책

친잠례는 왕비가 손수 누에치기의 모범을 보여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의식이다. 왕비의 친잠은 성종 8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행됐다. 조선시대에 총 8번 시행된 친잠례는 창덕궁 후원에서 왕비가 내외명부를 거느리고 뽕잎을 따는 의례로 이루어졌다.

혹시 슈룹을 봤다면 마지막회에 친잠례를 위해 중전과 후궁이 다 모였는데, 세자빈이 지각을 한다. 드라마에서는 모이는 장면만 나왔지만, 친잠례는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왕비와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행사였다.

 

친잠례를 기록한 친잠의궤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공간

영조는 정순왕후의 친잠을 기념하기 위해 친잠의궤를 만들고 경복궁에 기념 비석을 남겼다. 친잠의궤는 조선시대 왕비의 친잠에 대한 유일한 자료로 당시의 준비과정과 행사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친잠의궤

3층에 있는 3전시실은 개방형수장고와 기획전시실로 구성됐다. 2023년 3월 19일까지 조선의 왕비와 친잠례가 전시 중이다. 사진 왼편에 있는 탁본은 '정해친잠비'로 영조는 친잠례를 기념하기 위해 정해이라고 직접 쓴 기념 비석을 경복궁에 남겼으며 과거시험을 개최하고 특별사면도 내렸다. 

 

실록고출친잠의
친잠의궤 / 장종수견의궤

조선은 농업과 잠업을 산업의 기반으로 삼는 농본국가로서 밭농사와 누에농사의 풍요는 곧 왕의 치세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수시로 농상을 강조하는 왕의 교서가 내려졌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그림도 다수 그려졌다고 한다. 태종 17년에 개성부 및 5개 도에 잠실을 설치했고, 세종대에는 각 도마다 잠실이 설치됐다.

경복궁과 창덕궁에도 각각 잠실을 만들고 수천 그루의 뽕나무를 심어 키웠다. 기록에 따르면 세종 5년때 경복궁에 3,590그루, 창덕궁에 1,000여 그루의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창덕궁 후원 관람지 입구와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의 담 근처에 아직도 그때 그 뽕나무가 남아있다. 

 

동궐도 부분(복제품)
서궐도안 부분(복제품)
경복궁도 강녕전 동쪽 만춘전 앞에 채상대와 정해진참비가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왕비는 친잠례의 예복으로 국의(사진에서 왼쪽)를 갖춰 입었다. 국의는 뽕잎이 처음 돋는 빛깔로 국화의 황색과 같으며 왕비가 직접 뽕잎을 딸 때 입는 옷이다. 성종 8년 친잠례부터 국의 착용 기록이 확인된다. 

영조 43년에는 선잠제와 친잠례를 모두 왕비가 주체해 국의와 적의를 모두 착용했다. 적의는 꿩 무늬가 있는 법복으로 왕비는 대홍색 적의를 입었다.

 

조선시대 여성의 예복으로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가 입은 직금원삼
화순옹주의 것으로 전해지는 흉배
백주홑장저고리 / 광해군비 문화유씨의 홍색겹장저고리

조선 후기에는 의례 절차별로 왕실 여성의 의례 복식이 기록되어 있다. 왕비와 혜빈, 세손빈은 적의와 국의를 착용했고, 내외명부는 원삼을 입었으며 잠모는 상복을 입었다. 

 

성북선잠박물관에서 약 100미터 거리에 선잠단지가 있다!
선잠단지 입구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선잠단의 크기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이며 4방향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다. 제단을 둘러싼 상단과 하단 담장의 둘레는 각각 25보이다. 선잠제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가운데 중사로서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하고 누에치기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하유는 제단 아래 주위의 터를 돋우고 낮은 담장을 둘러친 공간으로 제관이 의례를 행하고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며 일무가 춤을 추던 곳이다.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경건한 문으로 제관들이 입장과 퇴장을 하는 곳이다.

 

계단 아래 주변은 상유 공간으로 제단 주위의 터를 돋우고 낮은 담장을 둘러쳤으며 의례를 행하는 신하들이 다니는 곳이다. 

 

선잠제 의례를 행하는 제단
예감은 폐백과 축판 등 제사에 쓰인 물품을 묻거나 태워 제사를 마무리 하는 곳

길상사로 가려면 한성대입구 부근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버스는 선잠단지 옆 골목을 지나쳐 간다. 휑한 공터인 듯, 유적지인 듯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한동안 어떤 곳인지 몰랐다. 선잠단지라고 알게 됐을 때도 정확히 몰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친잠례는 왕비가 주관한 유일한 여성 의례였으니, 선잠제에도 왕비가 직접 나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선잠단지의 원래 규모는 이보다 더 컸다고 한다. 길상사를 가기 위해 마을버스가 지나갔던 도로가 원래는 선잠단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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