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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시리즈에 왠 효창공원? 이런 의문이 드는게 당연하다. 솔직히 나도 몰랐다. 효창공원과 3·1절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선 백범 김구 기념관이 효창공원에 있고, 김구 선생 묘소 역시 효창공원에 있다.

지금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효창공원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분들이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3·1절 시리즈에 꼭 포함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너무나 몰랐던 나를 자책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그분들의 묘소를 찾아 떠났다.

 

효창공원 정문 창열문(彰烈門)이다. 여느 공원의 입구가 이러할까? 여기가 원래 공원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이유다. 원래는 조선왕조 22대 임금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가 있는 자리로 '효창원(孝昌園)'이었다고 한다.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훼손시킨 일제가 효창원도 이렇게 만들었구나. 

 

이정표를 따라서 다니면 좋을거 같다. 그러나 이걸 마지막에 본 나는 그저 공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봐야했다.

 

이유는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나와 바로 의열사부터 들어갔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의열사, 아래로 내려가면 효창공원 입구가 나온다.

 

의열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 조성환 · 차리석 선생과 임정주석  김구선생, 이봉창 · 윤봉길 · 백정기 선생의 삼의사 등 7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훼손 우려가 있어 상시 개방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배를 원하는 분은 공원사무실로 연락을 하면 된다고 하는데, 혼자 방문이기에 연락하기 애매했다.

 

그리하여 두손을 가지런히 모아 묵념을 한 후 멀리서 바라만 봤다.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어 아쉬었지만, 이렇게나도 볼 수 있어서, 직접 찾아 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다.

 

설마 했는데, 여기도 들어갈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왕들의 묘소는 쉽게 볼 수 있는데, 왜 여기는 이리 어려울까? 내내 의문을 갖게 했다.

 

문틈으로 담을 수 밖에 없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하는 셋째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김구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거 같았다.)

 

심의사의 묘.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의사(義士) 3인의 유해를 안장한 묘소로서 3개의 묘소와 비석이 있다. 이 중에는 유골이 없는 가묘(假墓)가 유일하게 있는데 이 가묘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남겨놓은 가묘로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게 되어 국내로 운구될 경우 이 가묘에 공식 안장할 예정이다. 이 가묘는 유일하게 비석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출처 - 위키백과)

 

역시 들어갈 수 없어, 멀리서 묵념을 했다.

 

왜 들어갈 수 없게 했을까?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면 된다고 하지만, 나처럼 홀로 오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개방을 해주면 안되는 것인가? 솔직히 좀 화가 났다. 그러다 공원을 다니면서, 묘소마다 있던 안내문을 보고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는 국립묘지 또는 왕들의 묘소가 아닌 공원이기 때문이다. 유적지라고 하지만, 공원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강아지와 함께 오는 사람들, 운동을 하기 위해서 오는 사람들,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효창공원은 유적지가 아니라 그냥 동네 공원같아 보였다.

 

서울신문 2013년 창경원과 효창원이라는 기사를 보고 더 확실히 알게 됐다.

"효창공원이 시끄럽다.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국립묘지로 승격시켜 정부가 관리하자는 취지의 법안을 대표발의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사적 공원, 근린공원으로 구청이 관리해 오던 터였다. 박수 받을 일 같은 데 지역에선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새다. 이곳저곳에 결사반대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반대 서명 운동도 있었다. 김광진 의원 측은 그럴 일 없다고 하는데,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하거나 운동시설을 이용하는 데 제약을 받는 게 아니냐, 독립 유공자가 추가 안장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잦아들지 않는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진다거나 차제에 묘역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러한 정황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국립묘지가 혐오시설 취급을 받고 있는 게 안타깝고 황당하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용산구의회가 반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3년 전에는 애국선열 영정을 모신 사당인 효창공원 내 의열사를 참배하는 것으로 6대 구의회 의정 활동을 시작했던 그들이다. 애국선열들이 살아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진다. (기사 일부)"

문효세자는 일제가, 애국선열은 우리가 이렇게 만들고 있는거 같아 너무 아팠다.

 

그분들이 있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지금 우리는... 일제때문에 훼손된 궁궐, 사찰 등 많은 유적지가 있지만, 우리도 모르게 우리 스스로 훼손하고 있는 근현대사도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때 상생(相生, 두 가지 또는 여럿이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란 말을 많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효창공원의 진정한 상생은 없는 것일까? 하긴 나도 공원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거 같다. 사실 공원의 여러 다른 모습도 많이 담아왔지만, 같이 올리지는 못하겠다.

 

효창공원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이 있다. 본래 1956년에 효창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운동장 건립 계획했지만, 사회 기관 단체, 여론, 국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1959년 6월 아시아 축구 선수권대회 유치가 확정되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은 효창공원에 축구 경기장을 짓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이젠 다른 나라 핑계를 댈 수도 없다. 우리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아니 무슨 공원 담벼락이 이리도 고풍스러울까?

 

이봉창의사 동상이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원흉인 일왕 히로히토를 폭살 제거하는 일이 바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전세계에 고발하고 응징하여 독립을 앞당기는 길이라 믿고 상해로 건너가 김구선생에게 거사를 자청, 허락을 받았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목슴을 빼앗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교수형을 당해 32세의 나이에 순국하였다.

 

우리나라 대한민국. 자랑스런 이 나라를 지켜내 주신 그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창경궁과 효창원 기사의 마지막 글귀처럼, 애국선열들이 살아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실지 정말 정말 정~~~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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