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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도 라면은 맛있다! (Canon PowerShot S50)

 

똑같은 1월 1일이지만, 신정과 구정이라는 이름으로 기나긴 명절 연휴가 있었다. 지금은 양력 1월 1일 신정이 하루만 쉬는 간단명료한 명절인 듯 명절 아닌 명절 같은 명절이지만, 어릴 시절 신정도 당당히 3일을 연달아 놀 수 있는 큰 명절이었다. 물론 겨울방학으로 12월 31일도, 1월 4일도 똑같은 연휴이지만, 명절만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왜 달랐을까? 우선 먹거리가 많았다. 명절이라고 부치고 지지도 볶고 끓이고 며칠 전부터 고소한 기름냄새에 괴기냄새까지 엄마들은 명절이 싫다고 하지만, 나는 먹을게 많아 너무 좋았다. 하지만 먹거리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다. 먹거리와 함께 다양한 볼거리 선물을 줬던 방송사의 명절 특집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큰 집도 아니고, 차례 지내려 시골에 내려가지도 않고, 그저 집에서만 보내야 했던 어린 나에게 명절 연휴는 솔직히 따분하고 심심한 나날이었다. 설날이라고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고, 딱히 나가봤자 놀 친구도 없으니 연휴가 끝날 때까지 그저 집에서만 보내야 했다. 손이 큰 엄마 덕에 먹거리는 넘쳐났지만, 하루 종일 먹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영화를 보고 싶어도 먼 종로까지 나가야 하고, 어린 아이가 혼자서 그 먼 곳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럼 명절을 서울에서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축제를 한다는 그 곳이라도 가면 좋으련만, 사람에 치인다고 그저 이런 날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 말씀을 조용히 따라야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먹기만 하면서 보낼 수는 없으니, 방법을 구해야 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최고의 방법이 바로 눈 앞에 있었는데 몰랐다. 바로 텔레비전이다. 이 아이만 있으면 12월 31일 가는해 오는해부터 1월 1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영화에 드라마에 쇼오락에 또 영화에 특집 드라마까지 그야말로 볼거리 백화점이다.

 

방바닥과 절친을 맺고 이불을 남친 삼아 쪼만한 네모 박스에서 나오는 것들에 집중하면 된다. 밥을 먹을 때도, 집에 손님이 와도, 절친과 남친을 부여안고 채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자리를 끝까지 지키면 된다. 그렇게 신정도 구정도 추석도 똑같이 보내면 된다. 늘 그렇게 보냈다. 그러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MBC, KBS1, KBS2, EBS 그리고 SBS까지 몇 개 안 되는 채널이었지만, 각 방송사마다 하는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즉 같은 시간대에 훨씬 더 잼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덜 잼나는 프로그램을 본다고 놓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채널을 자주 돌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절 전부터 예고했던 대박 영화를 놓치고 봤던 영화를 또 본 것이다. 역시 후회는 늦은 법.

 

 

신문 TV방송 편성표 (출처 - 구글검색)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기발한 진짜 생각해도 너무나 기특하고 갸륵한 방법을 찾아냈다. 명절 전날 집에 배달되어 오는 신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문은 어른들의 전유물이지만, 명절 전날 신문은 나의 전유물이었다. 그대신 아버지 보다 먼저 쟁탈해야 했다. 받자마자 1면이 아닌 맨 뒷면부터 하나씩 넘기다 보면 곧 새로운 세상으로 날 안내해주는 그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쁜 표는 본 적이 없다. 왼쪽은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시간이 표시되어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각 방송사별로 칸이 나눠져 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시간대별로 사다리게임을 하듯, 구역을 나눠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네모칸의 크기에 따라 재미있는 프로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 있다. 영화는 주로 저녁시간 대이기에 휑할 수도 있는 네모칸들이 그곳에 즐비해져 있다. 자 그럼 빨간펜을 들고 표시를 해야 한다. 1일날 꼭 봐야 할 프로들을 방송사별로 유심히 보면서 시간이 겹치지 않게 잘 조절하면서 말이다. 엑셀, 파워포인트, 한글에서 표 하나는 진짜 잘 하는데 아마도 그 원인이 명절 TV편성표의 학습효과가 아닌가 싶다.

 

만약 시간이 겹친다면 아쉽게 포기를 하던가, 아니면 왔다 갔다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뒤에 하는 프로의 앞 부분을 눈물을 머금고(?) 버리면 된다. 그렇게 첫날, 둘째날 그리고 마지막날까지 형광등은 꺼지더라고 작은 상자에서 나오는 빛만은 꺼트리지 않고 계속 불을 지폈다.

 

이젠 명절이 와도 지루하지 않았다. 신문만 내게 있다면, 하늘을 다 가졌으니깐 말이다. 그런데 그 하늘이 무너졌다. 명절 연휴 전날에 항상 나에게 기쁨을 안겨줬던 TV편성표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 전날 도착을 했던 것이다. 다음날 바로 알았으니 전날 신문을 찾아 하늘을 발견하면 되지만, 나보다 빠른 누군가가 있었다.

 

추석으로 기억하는데, 서울에 살고 있던 친척들이 우리 집에서 가족모임을 한다고 해서 엄마는 며칠 전부터 그 큰 손을 훨씬 더 크게 만들어 잔뜩 음식 준비를 했던 것이다. 명절 음식을 할 때 필수품이 바로 신문이다. 방바닥에 신문을 넓게 깔고 대형 전기프라이팬으로 전을 부쳐야 했다. 그때 내가 했던 일은 바로 신문 깔기였다. 내 손으로 직접 나의 하늘을 방바닥에 인사를 시켰던 것이다. 차라리 내가 보는 쪽으로 깔았으면 사망 직전에 확인이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나보다 빠른 누군가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역시 후회는 늦은 법. 이젠 플랜 B를 찾아야 한다. 방송국에서 하는 명절 예고편을 유심히 보고 나만의 하늘을 만들어 표시를 할까 생각했지만, 굳이 그렇게 까지 해서 봐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했다. 우선 가장 많은 보는 채널인 MBC부터 시작했다. 올 추석은 이런 영화를 하고 이런 쇼오락을 하는 구나. 음… 이거 나쁘지 않네. 이젠 KBS다. 그런데 문제는 예고 시간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MBC는 운명적으로 잘 찾아 냈지만, 다른 방송사는 이상한 예고만 하고 정작 내가 원하는 하늘은 보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은 내 편이었다. 나의 정성을 하늘이 알았는지, 길을 안내해주셨다. 그저께 삼촌이 들고 온 00스포츠 신문이 눈에 보였던 것이다. 화려한 컬러로 된 스포츠 신문이 나에게 윙크를 하고 있었다. 삼촌이 다 읽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 방바닥 인사에서 제외시켰는데, 이걸 바로 천재일우라고 하나보다.훨씬 더 예쁜 표로 영화, 드라마, 뉴스 등 항목별로 표시도 따로 되어 있는 신세대 하늘이 나에게 왔던 것이다. 당장 빨간펜을 들어야 하지만, 아직 다 못 봤다는 삼촌의 말이 생각나 가위로 오려냈다. 뒷면의 기사는 생각도 안하고 이렇게 오려냈으니 뭐라고 하지 않겠지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빨간펜으로 정성을 가득 담아 작업을 시작했고, 그 해 추석은 시끄러운 친척들 땜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시청을 하고 명절을 마무리했다.

 

 

지금이야 인터넷 검색으로 공중파는 물론 케이블에 종편까지 명절 방송 편성표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종이신문을 찾던 그 손은 이제는 몇 번의 터치만으로 하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방송이 다양해지면서 시간대 조절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것보다는 굳이 명절 특집방송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쇼나 오락은 다음날 재미난 장면만 올리는 동영상을 찾아보면 된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하느냐? 명절 시즌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거나, IPTV로 TV에서는 하지 않는 아주 따끈따끈한 최신 영화를 본다. 아니면 이젠 집에 있지 않는다. 밖으로 해외로 나가는 그런 어른이 됐다. 이제는 다양해지고 풍족해지고 편한 세상이지만, 없기에 부족했기에 그만큼 더 소중했던 거 같다.

 

같은 시간대에 하는 영화를 가지고 난 이거 볼래, 오빠는 이걸 볼래 하면서 싸웠던 추억. 왜 하필 7시와 9시에는 뉴스를 하는지, 약주하신 아빠에게 시간을 속여가면서 다른 프로그램을 봤던 추억. 보물단지처럼 명절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빨간펜 신문의 추억. 늦은 밤 영화를 보겠다고 감기는 눈과 싸우다가 꼭 결말을 놓쳐버린 추억. 차 막히는 고속도로를 보면서 안됐다, 불쌍하다, 저렇게까지 해서 가야 돼 하면서 은근 부러워했던 추억. 지금 생각해보면 다 소중한 추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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