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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코털
본 내용과 큰 관계가 없는 이미지입니다.

둘째는 첫째가 하는 모든 일을 따라서 그대로 행동하곤 합니다. 저 역시 둘째인지라, 첫째였던 친 오빠의 행동을 떠라 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남들보다 팝과 헤비메탈 그리고 일본 음악을 어린 나이에 듣기 시작했고, 사춘기 소녀들은 할리퀸 로맨스 소설에 홀릭되어 있을 때, 저는 무협지에 빠져버렸답니다.

 

중학교부터 무협지를 읽기 시작했던거 같아요. 아마도 그 시작은 김용의 영웅문이었던 같습니다. 우연히 오빠 방에 들어갔다가, 한자로 크게 적힌 ‘영웅문’이라는 표지를 보게 됐고, 밥도 안 먹고 보는게 이거인가 싶어 한 권을 슬쩍 들고 나왔죠. 꾀꾀한 냄새도 나고, 누런 종이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림 하나도 없는 딱 봐도 재미없는 책인데, 뭐랄까? 왠지 안보면 안될거 같아서요. 그냥 첫째를 동경하는 둘째였던지라, 막무가내로 봤던거 같습니다.

 

시작은 참 어설펐지만 어느새 저도 모르게 무협지에 홀릭되어 버렸죠. 한 권, 한 권 읽을때마다 왜이리 재미가 있던지, 무술이 뭐고, 고수가 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이 최고가 되기 위해 눈물 나는 노력들을 보면서 깊게 빠져버렸습니다. 영웅문(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시리즈를 다 읽고 난 후, 김용이라는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고, 저에게 있어 가장 감명 깊었던 책이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는 그 책을 드디어 접하게 되었습니다.

 

녹정기
출처 - 다음검색

바로 무술 하나 할 줄 모르지만, 세상과 여자를 다 가졌던, 위소보라는 남자의 성장기를 보여준 그 작품, ‘녹정기’입니다. 정말 녹정기를 보면서 광활한 대륙을 알게 되었고, 머리가 좋고, 현명한 여자를 만나게 되면 죽지 않고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책이죠. 드라마와 영화로도 나왔지만, 원작보다 못하더군요. 어릴때 삼국지를 엄청 좋아했던게 무협지까지 연결되었는지, 남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무협지를 오빠보다 더 맹목적으로 빠져서 읽었습니다.

 

도서관에는 없었지만, 오빠 방에만 가면 볼 수 있는 책으로 무지 진귀한 책인 줄 알았습니다. 기본적으로 10권이 넘는 어마어마한 양으로 인해 중국 역사 소설로 인식했었답니다. 아미파, 소림파, 무당파, 화산파, 공동파, 청성파, 곤륜파같은 다양한 문파와 그들만의 무술을 보면서 동방불패, 천녀유혼 속 그분들이 바로 이분들이구나 하고 혼자서 영화보다 더 스팩터클하고 웅장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빠 몰래 봤던 무협지를 녹정기부터는 오빠보다 먼저 보게 되고, 다음 권을 빨리 가져다 달라고 요구하는 단계까지 갔습니다. “여자애가 무슨 무협지를 보냐”며 핀잔을 줬지만, 끊을 수 없었기에 모든 핀잔을 다 먹으면서 까지 다음 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오빠는 친구들끼리 책을 돌려보고 있어서, 앞의 친구가 다 봐야 볼 수 있었습니다. (만화가게에 무협지가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거든요. 첨에는 돈 많은 친구가 책을 산 후 돌려 보는 줄 알았습니다.)

 

곗돈도 1번이 좋다고, 돌려보는 책도 첫번째가 좋습니다. 오빠의 정확한 순번은 알 수 없었지만, 1~3권까지는 회전율이 무지 높다가 점점 늘려지기에 혼자서 속을 좀 태웠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녹정기 다음 권이 오게 되면, 제가 먼저 보면 좋으련만, 덩물(?)에도 순서가 있다고 역시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빠가 없을 때 몰래 몰래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게 되면 심한 갈증으로 차라리 좀더 기다리는게 좋더군요.

 

책을 빨리 보는 습관도 아마 이때 터득한거 같습니다. 한 권을 보는데 하루만 충분했거든요. 정말 잠도 안 자고,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서 나오기 직전에 배를 잡고 가기도 했었거든요. 그렇게 좋아하던 무협지를 한 순간에 끊게 되는, 아니 오빠가 가져오는 무협지를 끊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눈치가 빨랐으면 진작에 알았을 텐데, 나무는 못보고 숲만 봤던 지라 너무 몰랐습니다. 무협지는 늘 새 책이 아니고, 누렇게 변질(?)된 책이었습니다. 오래된 책 냄새가 나쁘지 않았기에, 책을 보다 잠이 들 때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자기도 하면서 항상 제 몸처럼 끼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무협지 속의 비밀을 알게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책에 인쇄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모음이 너무 길게 되어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이런 오타는 종종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책 내용에도 큰 문제가 없기에 그냥 넘어갔습니다. 일자로 길게 잘못된 모음이 어느 페이지에는 대각선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요건 좀 너무하네 싶어 손바닥으로 가볍게 책을 훑어주니, 대각선의 오타가 사라져버리더군요. 아하, 인쇄가 잘못된게 아니라 이물질(?)이 들어갔던 거구나 하고서는 책을 보다 나오는 이물질마다 경건하게(?) 훑어줬습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많더군요. 아무리 오래된 책이라지만 친구들끼리 본다지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이물질이었습니다. 훑어주는 것도 일이 되어 버리니, 내용보다는 먼저 이물질부터 없는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물질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헐~~ 허걱~~~ 까만 실 같은 이물질인데, 그 끝이 달랐습니다. 한쪽 끝은 머리카락처럼 날카로웠고, 다른 끝에는 둥근 무언가가 붙어 있었습니다. 꼭 아이 머리카락처럼 말이죠. 그런데 머리카락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았습니다. 이게 뭐지, 이게 뭘까 그 궁금증이 증폭되어 갈 때, 봐서는 안될 그걸 보고야 말았습니다.

 

다음 권을 찾기 위해 오빠 방에 들어가는 순간, 책을 보고 있던 오빠를 보게 되었는데, 책에다 무언가를 닦는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더군요. 책장을 넘기는구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가락으로 코털을 뽑고 난 후, 그 털을 책에 붙이고 있더군요.

 

아~~~악~~~ 이렇게 소리를 질려야 하는데,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 동안 열심히 청소해줬던 그 많고 많은 이물질들은 모두다 소유주를 알 수 없는 어느 누군가의 코털이었다는 말이란 말인가? 들고 있던 책을 내동댕이치고는 바로 제 방으로 와서 침대부터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컷의 코털을 내 침대에서 같이 생활했다는 자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더러웠거든요. 더불어 손과 얼굴을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씻어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죠.

 

이때 확실히 끊어야 했는데, 너무 깊게 빠져버린 저는 몇 권 남지 않은 녹정기를 다 읽기 위해 책의 모서리 부분만 잡고, 코털이 있는 페이지는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읽고 넘겼습니다. 녹정기를 다 읽고 난 후, 오빠로부터의 지원(?)을 끊고 스스로 찾아 읽기 시작했지만, 한동안 남자들이 좋아하는 만화나 무협지를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참, 모르고 깨끗이 책 청소를 하면서 볼 때, 어떤 이물질은 여러 번 훑어줘야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가 책이 딱 고정되어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거였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할거라 생각했던 무협지는 코털 사건 이후로 점차 멀어져 갔습니다.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던 할리퀸 로맨스 소설과 순정만화 잡지로 눈을 돌렸거든요.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무협지는 아니고 판타지 소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입니다.

 

무협지와는 또다른 맛을 주는 판타지 소설에 매료되어 버려서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까지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 동화까지 섭렵하게 되었습니다. 무협지는 책이 최고라 생각했는데, 판타지는 책보다는 영상이 더 좋더군요. 원작을 기다리면서 읽고, 영화도 기다리면서 보게 되는 판타지 홀릭녀가 되어, 지금도 판타지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는 1인이 되어버렸답니다.

 

무협지는 김용작가 이후로 딱히 볼만한게 없더군요. 영웅문, 녹정기를 읽고 또 읽었고, 해적판까지 읽었기에, 지금은 다 아류작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전히 김용 작가의 작품만 찾게 되네요. 아픈 코털의 추억으로 인해, 예전에 자주 가던 헌책방을 안 가게 되었지만, 가끔 오래된 책에서 나는 내음이 그립긴 합니다. 제발 그 녀석은 없었으면 좋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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