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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때문에 희생된 분들은 아니지만, 우리 내외도 사실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이지만” 이게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르겠다. 뭐가 뛰니깐 뭐가 뛴다고, 지들이 한 일을 안했단다 더해서 자신들도 희생자란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정말 어이가 없다. 그때는 사면을 했지만, 이번에는 어떤분이 대통령이 될지 모르지만, 사면을 절대 해줘서는 안된다. 몇십년 후, 회고록이랍시고, 그때 나도 희생자였다고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곳을 한번이라고 와봤을까? 자국민을 상대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진짜 모르는 것일까? 모른척 하는 것일까? 죽기 전에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내려와서 직접 보라고 하고 싶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지키기 위해 그때는 횃불이, 지금은 촛불이 되었다. 더이상의 역사 반복은 없길 바라면서, 광주에 있는 5·18 자유공원이다.  



칠흑 어둠속에서 별은 빛나고

혹한을 지나 들꽃은 피어납니다.

다만 지극히 낮고

뜨거운 열정으로 소외될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타올라 영원한 들불 한점. 밝은 별은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께 깃들어

모든 억압에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벗이 되었습니다.

삼가 세상의 순결한 것들의 이름을 빌어

아름답고 고귀한 님들의 가치를 여기에 서웁니다. (들불열사 기념비 / 사진 오른편)



5·18 자유공원은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정권찬탈을 기도하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분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이다. 드높은 민주화 의지와 젊은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했던 투쟁의 자취요. 인권 평화 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될 역사의 현장이다.


1980년, 너무 어렸기에 잘 몰랐다. 국정교과서 세대라 잘못된 역사가 옳은 역사인 줄 알고 있었다. 너무 늦게 알았고, 너무 늦게서야 왔다. 저 앞에 자유관(전시실)이 보이는데, 나아갈 수가 없다. 무거운 맘으로 오랫동안 묵념을 한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로비에 있는 대형 사진은 1980년 5월 16일 교수, 학생,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민족민주화성회라고 한다. 36년 후 광화문 광장에 100만명이 모여 촛불을 밝혔다. 이런 역사는 반복되지 말았어야 하는데...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진행중인가 보다.



자유관내 전시실은 역사의 사건, 맨주먹의 저항, 죽음과 부활, 천년의 빛 5·1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날의 아픔이, 그들의 함성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거 같다.




1980년 5·18민중항쟁 당시 희생된 사망자의 시신을 덮었던 것으로 망월동 구묘역에 매장될 때 함께 묻혔다가 1997년 희생자들을 5·18묘지로 이장하면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린 학생과 청년들 5명이 사형선고를, 7명이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어떻게해서 사형이고 무기가 되는지 법조인이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제가 수괴로 조작되었는데 수괴의 역할이 너무 없다. 광주시민들에게 정말 수괴가 있었느냐고 물어보라. 수괴가 있었다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분명히 여기 법관들의 이름과 우리 피고들의 이름이 후세에 남게 될 것이다. 이 법정의 재판이 오판이었는지 아닌지는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군사재판 최후진술 중 일부 발췌)  2017년 헤어롤 하나가 이렇게 감동으로 다가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전시실 관람을 끝내고,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중이다. 



원래는 헌병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곳은 아픔의 현장이 되었다.



"이게 나라냐?"




헌병대 중대내무반. 헌병들이 취침 등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었는데 시민군 등 연행된 인사들이 너무 많아서 임시로 심문실과 고문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때까지 몽둥이, 각목으로 모진 매질과 구타를 했으며, 이마저도 통하지 않을때는 물고문, 고춧가루고문, 전기고문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인간도살장이었다. 





헌병대 본부사무실. 시내에서 계엄군에 끌려온 시민들을 조사했던 곳이다. 수사관들은 조사하기 전부터 무조건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시민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바로 옆에서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을 지켜본 연행당한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지 않기 위해 허위자백이라도 해야했다.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지르는 신음소리와 비명소리는 끌러온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고 한다. 즉, 인권이라는 말도 할 수 없는 인권의 무덤이었다. 100년 전 역사가 아니다. 1980년 5월의 역사다.



원래 이곳은 잔디가 없고 모래와 자갈뿐이었다고 한다. 일반 시민을 상대로 가혹한 폭행을 서슴없이 하다니, 조형물임에도 가까이 다가가서 보는게 너무 힘들었다. 뒤에 보이는 건, 헌병대 중대내무반이다. 잠을 자던 곳이 하루아침에 고문실이 되다니, 사면을 해주지 말았어야 했다.



헌병대 식당. 고문과 조사를 받는 임시취조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잡혀온 시민들에게 매일같이 자술서와 진술서를 쓰게 했으며,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온몸이 피범벅이 되도록 구타를 했다.



어라~ 취조실이라더니... 아무래도 식당이었으니 그 역할을 했구나 했다.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물고문을 여기서 하다니...










표정한번 진짜 리얼하다.


헌병대 영창. 강제 연행된 시민들은 하루 16시간의 정좌자세 수감생활과 가혹한 구타와 감시 등 인권을 유린당했다. 수감기간 동안 한 방에 많게는 150명씩 수감되거나, 영창 내 독거실에 10여명씩 갇혀, 더위와 배고픔을 이겨내야 했다. 1인용 식기에 두사람이 먹게 했고, 밥도 3숟가락 밖에 주지 않았다고  한다. 잡혀 온 시민들은 헌병들의 무참한 폭력에 굴종을 강요받았지만,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서로 굳게 뭉쳐 꿋꿋이 극복해 나갔다. 1980년 10월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될때까지 구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법정. 1980년 8월에 급히 만들어진 군사법정이다.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입장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로 약식재판을 진행했다. 구속자들은 재판이 시작되자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름으로서 부당한 군사재판에 저항했다고 한다. 군사재판부는 이미 짜여진 각본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 사형, 무기징역 등 실형을 선고하였다. 언젠가는 5·18의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져 반드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굳은 신념으로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으로부터 19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에 중요한 민주화 운동 사례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날, 발포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 이때는 대통령 기록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남아 있는 기록도 없단다.


이래서 청와대 압수수색이 필요하다. 청와대가 파쇄기를 대량 구입했다고 하던데, 설마 기록을 없애고 나오지는 않았겠지.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노무현대통령님이 만든  대통령 기록물법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도 올라왔으니, 진실이 그리고 정의도 올라왔으면 좋겠다. 몇십년 후 희생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회고록을 내는 일이 진짜 정말 레알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바람이 불어도 먼저 눕지 말고 법과 원칙에 따라 소신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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