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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에는 토담과 돌담으로 유명한 함라마을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이었던 향교도 있다. 함라마을은 만선꾼 부잣집이 셋이 있어 삼부잣집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향교(학교)가 있으니, 삼부잣집 도령들은 땡땡이를 치지 못했을 거 같다. 부잣집이니 교육열은 얼마나 대단했을지, 안봐도 비디오. 지금은 사람 한명없는 적적하고 쓸쓸한 향교가 되어버렸지만.... 전북 익산에 있는 함열향교다.



향교(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조선시대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의 안찰사에 명하여 학교의 흥폐로써 지방관고과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여기에서 부 목 군 현(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하고 있다고 한다.



외삼문

함열항교는 【1437년(세종 19)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491년(성종 22) 명륜당이 건립되었으며, 1591년(선조 24)금곡(金谷)으로 이건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영조 때 중건되었다가 1831년(순조 31)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건물로는 대성전·영소전(靈昭殿)·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난심재(蘭心齋)·교직사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륜당을 기준으로 왼쪽 건물은 서재, 오른쪽 건물은 동재라고 한다. 명륜당의 지금의 강의실(교실)이라고 보면 된다. 



인실문

여기(명륜당 뒤에 있는 문)를 지나가야 대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문이 잠겨있다. 관리하는 분도 안보이고, 여기서 한시간 정도 보냈는데 사람은 나뿐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한적한 곳이라 개방을 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다.



대성전은 이렇게 까치발을 하고 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발길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데...



문이 열려 있는 곳이 있다. 혹시 저 안으로 들어가면 대성전으로 갈 수 있을까? 그 전에, 향교에 왠 우물이???



우물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오래전 영화 링을 보고, 일주일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우물이 있다. 설마 물까지 있을까 싶어, 직접 바라보지는 못하고 손을 길게 뻗어 사진만 찍었다. 오호~ 진짜 물이 있는 우물이다. 근데 뒷골이 막 땡기고, 누가 자기 다리를 달라고 막 쫓아올 거 같기도 하고, 으스스 몸이 떨린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거 같아서, 열려 있는 문을 향해 뛰었다.



난심제


협문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라고 한다.  



대성전 옆에 있는 영소전은 공자님의 영정을 봉안한 건물이라고 한다.



우물때문인가? 앙상한 나무때문인가? 덩그러니 있어서 그런가? 역사유적지 탐방을 좋아히지만, 함열향교는 너무 무섭다. 오늘따라 나홀로 여행이 참 싫다. 



함열향교는 여끼까지. 고즈넉의 끝판왕이자, 예스러움이 묻어나는 돌담길을 만나기 위해 함라마을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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